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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과학과 우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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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원자탄의 원리는 히틀러 지배하의 독일에서 처음 발견됐다. 물리학자 오토 한은 1939년 우라늄에 중성자를 느리게 충돌시키면 핵 분열과 함께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나 그는 원자탄을 만들라는 나치의 지시는 거부했다. 평화적인 원자로 개발에만 힘을 쏟았다. 패전 직후 한은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유폐돼 있었다. 포로수용소 소장은 원자탄이 투하됐다는 소식에 그가 자살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헝가리 출신의 레오 질라드는 고향 사랑이 유별난 미국 과학자였다. 그는 히틀러가 조국 헝가리를 휩쓸자 자진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45년 7월 16일 오전 4시 미국 네바다주 사막을 지나던 트럭 운전사는 "갑자기 지평선 위로 1000개의 태양이 떠오르더니 사라졌다"고 신고했다. 원자탄의 위력을 실감한 질라드는 이때부터 원폭 투하에 반대했다. 그는 동료인 페르미에게 "오늘은 인류 역사에 가장 불행한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정치가와 군인들에 의해 묵살됐다.

"과학자는 인류의 친구인가 적인가." 영국 화학자 막스 페루츠가 던진 질문이다. 질소에서 암모니아를 합성한 프리츠 하버는 질소비료를 만들어 인류를 기아의 공포에서 해방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은 독가스 개발자도 하버였다. 패전 후에는 전쟁 배상금에 시달리는 조국을 위해 바닷물에서 금을 뽑아내는 엉뚱한 연구에 매달렸다. 그런 하버도 결국 나치에 의해 '유대인 과학자'로 몰려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최근 황우석 교수 지지자가 분신자살을 해 충격을 던졌다. 과학이 비뚤어진 신념과 결합된 비극이다. 과학은 연구실 문턱을 넘는 순간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정치가와 장군들은 끊임없이 쟁기를 녹여 무기로 만드는 일을 반복해 왔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황 교수의 발언은 근사하게 들린다. 그러나 나치 치하 독일인도 우생학에 열광했다. 과학과 맹목적인 애국심이 낳은 비극이다.

일본 히로시마 시립 여자고등학교에는 세 소녀의 상이 서 있다. 원폭 위령비다. 소녀 중 한 명의 가슴에는 아인슈타인의 'E=mc2' 공식이 새겨져 있다. 인류가 과학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말없이 경고하고 있다. 이제 줄기세포 스캔들이 과학의 영역을 넘어 사회문제가 됐다. 흥분부터 가라앉혀야 한다. 과학이 우상이 되면 언제든 흉기로 돌변할 수 있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