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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책과 정세판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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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러나 히틀러는 영.불 양국에 일전불사(一戰不辭)의 결의가 없을 것으로 판단해 외교적 도박에 나선다. 38년 9월 히틀러는 독일과 접경한 체코 북서부의 주데텐 지역을 할양하라고 요구했다. 현지의 독일계 주민들이 차별받고 있기 때문에 '민족자결' 차원에서 흡수하겠다고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주데텐만 할양받고 나면 평화를 유지하겠노라고 언명했다.

취임 이래 줄곧 유화정책을 펼쳐온 체임벌린은 이 요구도 들어주는 것이 전쟁을 막는 유일한 방책이라 판단했다. 당사국인 체코는 동맹국이던 프랑스와 함께 일전을 불사할 준비를 갖췄다. 하지만 영국이 반대하자 프랑스가 나서지 않았고, 홀로 독일을 대적할 수 없는 체코는 속수무책으로 주데텐 지역을 할양하게 됐다. 이 악명 높은 '뮌헨회담'의 타결을 위해 당시 69세의 체임벌린은 한 달에 세 번이나 독일로 날아가 히틀러와 정상회담을 벌였다. 그리고 런던공항에 돌아온 체임벌린은 합의서를 흔들며 "우리 시대의 평화가 여기에 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주데텐 흡수에 이어 다음해 3월 체코 전역을 침공, 점령해 버렸다. 이미 천혜의 요새 지역을 내준 체코는 독일군이 밀려들자 속수무책으로 전 국토를 내주게 된 것이다. 합병 이후 독일은 체코의 군사산업을 흡수해 비약적으로 군사력을 신장시켰고, 이를 지켜보던 스탈린은 영국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만다. 뮌헨협상으로 히틀러는 이후 폴란드.프랑스를 제압하고, 영국까지 사멸 직전까지 몰아넣을 수 있는 외교.군사적 기반을 확보하게 됐던 것이다.

이 유화정책에 대한 평가는 대개의 역사적 사건이 그렇듯 몇 차례 반전을 겪었다. 그러나 정책 결정이라는 측면에서 체임벌린의 외교는 되풀이해서는 안 될 교훈을 보여준다.

어느 지도자나 자신이 겪어온 한정된 인생경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체임벌린은 외교.안보 문제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고 이전의 재무장관 경력으로 인해 영국의 취약한 재정상태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만의 하나라도 대결 국면은 절대 피해야 한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조약 체제가 독일에 너무 가혹한 것이었기 때문에 독일의 불만을 해소해 주는 것이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보던 국민정서에도 편승했다.

자신의 정세평가를 과신했던 체임벌린은 주변의 참모도 모두 '예스 맨'으로 채웠다. 히틀러에게 동정적이던 네빌 헨드슨을 주독대사에 기용했고, 유화정책을 반대하던 앤서니 이든 외무장관 내각을 떠나게 했다. 이런 '인(人)의 장막' 속에서 윈스턴 처칠 등 비판 그룹이나 외무부 내 전문가들이 제기한 히틀러 위협론은 도외시했던 것이다. 여기에다 세 번이나 히틀러를 찾아 독일을 방문함으로써 미리부터 영국이 양보를 할 구상이라는 신호를 던지고 가는 실수를 범했다.

뮌헨회담의 교훈은 이후 미국의 대공산권 봉쇄에서 대결주의를 합리화하게 하는 소재로 사용되면서 이 교훈에 너무 집착하면 지나친 긴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또 다른 교훈도 남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책 결정에서 지도자 그룹이 자신들의 사전인식만을 과신할 때 일어나는 문제점을 부각시켰다는 면에서 체임벌린의 실패는 시대를 넘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김승영 영국 애버딘대 교수·국제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