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now] "예술의 도시에도 비참한 이웃" 무언의 시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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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프랑스 파리의 고급주택 밀집지역인 16구. 동양 고미술품이 많기로 유명한 기메 박물관이 고풍스럽게 자리 잡은 이에나 광장 한쪽에 생뚱맞게도 텐트가 하나 설치됐다. 입김이 날리는 추운 날씨에 야영장도 아닌 도심 대로변에 선 회색 텐트는 문화도시 파리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흉물이다.

이 텐트는 올 겨울 인도주의 단체인 '지구촌 의사회(MDM)'가 노숙자들에게 무료 제공한 것이다. 파리 시내에 250개나 설치돼 대로변에서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기메 박물관 앞에 들어선 텐트의 주인은 크리스토퍼. 폴란드 출신인 그는 2년 전 프랑스로 넘어와 이곳에서 노숙자로 살아왔다. 2일 만난 크리스토퍼는 추운 날씨에도 상반신을 텐트 밖으로 드러내 모처럼 내리쬐는 겨울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다가가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춥지 않으냐"고 묻자 "텐트 바로 아래가 지하철 환풍구라 따뜻한 온기가 느껴져 괜찮다"고 말했다. "왜 노숙자 수용소로 가지 않고 여기서 사느냐"는 질문에는 "그런 곳은 프랑스인만 받아준다"고 말을 잘랐다.

MDM이 노숙자들에게 텐트를 나눠 준 이유는 그들의 동사를 막겠다는 것이지만 추운 겨울 노숙자들을 대책 없이 거리에 방치하는 당국에 무언의 항의를 하겠다는 목적도 있다. 시민과 관광객에게 "이토록 아름다운 도시에 이렇게 비참한 이웃이 아직도 많이 있다"고 외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그렇다고 프랑스 정부가 노숙자 대책을 손 놓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당국은 한파가 몰아닥칠 때마다 노숙자들을 수용소로 대피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밤에만 노숙자들을 대피시키는 것이어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지구촌의사회의 노숙자 책임자인 그라지엘라 로베르는 프랑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파가 닥칠 때 임시로 대피했다가 아침이면 다시 나가야 하는 수용소가 아니라 계속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주장했다. 겨울 한철만이라도 실내체육관 등을 숙소로 개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운동공간을 빼앗기는 것을 꺼리는 지역 주민의 반대로 실행에 옮겨지지 않고 있다. 여성들만 받아들이는 수용소가 없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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