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물타기 작전? “오바마가 내 전화 도청, 나쁜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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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현직 대통령 충돌

“끔찍하다! 오바마는 저급하다. 나쁜 사람이다.”

법무장관도 러시아 접촉 의혹 일자 #트위터로 “워터게이트식 도청” 공격 #오바마 측 “쓰레기 같은 주장” 반발 #CNN “판사만 도청 영장 발부 가능”

그동안 자신의 비판자들을 향해 막말을 해왔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혀끝이 이번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을 향했다. 트럼프는 4일(현지시간) 트위터를 통해 “오바마가 선거 기간 동안 내 전화를 도청했다”고 비난했다. 트럼프의 측근인 제프 세션스 법무장관이 장관 지명 전 미국 주재 러시아 대사를 만나고도 청문회 때 이를 숨겼다는 것이 밝혀진 지 이틀 만이다. 이를 두고 워싱턴 정가 일각에서 국면전환을 위한 술책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이날 트럼프는 “신성한 선거에서 전화 도청은 매우 저급한 짓”이라며 “훌륭한 변호사라면 오바마가 지난해 10월 내 전화를 도청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오바마의 전화 도청은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스캔들과 다름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트럼프, 오바마·메드베데프 대화도 공격

트럼프는 5일에도 트위터를 통해 “러시아 대통령과 몰래 말한 사람이 누구냐?”며 오바마를 공격했다. 2012년 3월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오바마 전 대통령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당시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 중 마이크가 켜진 것을 모르고 나눴던 밀담 내용을 화제로 삼은 것이다. 당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던 오바마는 메드베데프에게 “선거가 끝나면 좀 더 유연해질 수 있다”고 말해 구설에 올랐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들은 트럼프 측근을 인용해 “트럼프가 극우 매체 브레이트바트뉴스의 기사를 보고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지난 3일 브레이트바트뉴스는 “오바마 정부가 대선 당시 트럼프 후보의 러시아 커넥션 의혹을 도청 등을 통해 수사하라고 법무부에 지시했다. 연방 정보기관의 감시장비를 동원해 트럼프의 선거운동을 사찰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오바마 측은 트럼프 측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오바마의 대변인인 케빈 루이스는 4일 성명을 통해 “오바마 행정부의 어떤 관리도 법무부 수사에 관여하거나 트럼프를 포함한 미국인에 대한 사찰을 지시하지 않았다. 오바마 행정부의 기본 원칙은 백악관이 법무부의 독립적 수사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바마 정부에서 백악관 선임고문을 지낸 데이비드 액설로드는 “트럼프의 주장은 쓰레기 같다”며 “미 연방수사국(FBI)이 트럼프를 도청했다면 이는 오바마가 지시한 때문이 아니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대선 때 FBI는 트럼프의 러시아 내통 여부를 수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관련 전문가들은 오바마 정부가 법무부에 특정인에 대한 사찰이나 도청을 지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NYT “극우매체 인용, 음모론 확산”

CNN은 법무부에 정통한 전직 고위 관료를 인용해 “도청 영장은 수사관이 판사를 통해 발부받는 것이지 오바마가 지시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며 “트럼프가 해외 요원과 내통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을 경우에 한해 연방 판사가 도청을 승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 언론들은 트럼프의 이번 의혹 제기가 가짜 뉴스의 생산 방식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NYT는 “트럼프가 브레이트바트뉴스 기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트럼프는 대통령으로서의 발언권을 정적을 폄훼하는 음모론에 악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브레이트바트뉴스의 설립자는 트럼프 최측근으로 백악관 수석전략가를 맡고 있는 스티브 배넌이다.

일각에선 트럼프 측근 인사들의 잇따른 러시아 연루 의혹으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가 ‘맞불 작전’에 나서 승부수를 띄웠다는 지적이다. 세스 멀턴 민주당 의원은 “트럼프가 세션스 법무장관 등 러시아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측근들로부터 대중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이런 주장을 펴고 있다”고 NBC뉴스 인터뷰에서 말했다.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도 “물타기 대장(Deflector-in-Chief)인 트럼프가 또 물타기를 시작했다 ”고 비판했다. 트럼프는 오바마의 도청 의혹을 제기하면서 “세션스를 만났던 러시아 대사는 오바마 임기 동안 백악관을 22번 방문했다. 임기 마지막 해엔 네 번이나 찾았다”며 “세션스는 러시아와 내통하거나 인준 청문회에서 위증을 하지 않았 다”고 말했다.

이기준 기자 forideali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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