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봄, 너의 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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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호 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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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 사전
입춘(2월 4일경)에서부터 입하(5월 6일경) 전까지를 말한다. 천문학적으로는 춘분에서부터 하지까지가 봄이지만, 기상학적으로는 3·4·5월을 봄이라 한다. 한국 봄 날씨의 특징으로는 아지랑이·이동성 고기압·황사 현상·심한 일교차 등을 들 수 있다.

이윤정의 공감 대백과 사전

그여자의 사전
돌아올 때마다 ‘신비함’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계절. 꽃, 따뜻함, 생명, 새 출발 같은 좋은 기억들로 채워진 시간. 그러나 나이 들수록 ‘나’의 봄은 즐거웠지만 ‘타인’의 봄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



어느 오래 전 봄날, 아직 애기 같았던 아이가 물었다. “엄마, 왜 요맘 때면 나무마다 하얀 팝콘 같은 것이 잔뜩 매달려 있나요?”

어이쿠, 내가 이렇게 자식 교육에 게을러 자연에 무지한 아들을 만드는구나. 당황했지만 침착한 척 대답해줬다. “얘야, 저것은 팝콘이 아니라 벚꽃이라고 하는 거다. 참 아름답지 않니.” 봄이 올 때마다 이 기억을 나누며 아들을 놀린다.

봄이 되면 꽃이 피는 것처럼, 아니 해마다 이쯤이면 봄이 돌아오는 것처럼 어김없는 일도 없다. 또 그때마다 어김없이 신기하다. 모든 것이 딱딱하게 꽁꽁 얼어있던 겨울에는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 않던 풍경들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볼품없는 꼬챙이 같기만 하던 가지에서 초록색 싹이 움트고, 수십번을 다시 보던 꽃빛이었는데도 마치 수십년만에 처음 보는 것처럼 새삼 반갑다. 심지어 무생물인 거무죽죽한 길바닥과 공기마저 꿈틀꿈틀 거린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인데도 그때마다 놀란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일을 꼽으라면 ‘어쨌든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야 마는’ 일을 말하곤 한다.

그리고 해마다 봄을 맞기 위해 어디로 가곤 한다. 지난 주말엔 봄 매화를 보러 강릉에 다녀왔다. 아직 꽃잎을 활짝 펴지 않은 동그란 꽃망울이 나뭇가지에 방울 방울 매달려 있다. 숨어 있던 생명을 불러내는 위대한 봄에 감탄하고 취해 다니며 봄에 얽힌 추억들을 생각한다.

봄이 좋은 건 좋은 추억들이 많아서다. 어릴 적 예쁜 정원이 있던 집에서 애기초록이 피어나던 모습, 교복 자율화되던 첫 해 연주홍색 치마를 사놓고 입학날만 기다렸던 때, 첫 출근때 입었던 개나리색 스프링코트, 가족들의 봄 나들이에서 먹었던 아이스크림, 더 커서는 아이의 아장아장 첫 걸음, 입학식 때 설렘과 기대로 초롱초롱 빛나던 아이의 눈. 모두 나의 봄에 있었다.

하지만 동행한 친구의 봄은 다른 기억들로 채워져 있었다. “봄만 되면 꽃가루 알레르기에다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소식을 듣고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데, 차창 밖은 더할 나위없이 새로운 생명이 넘쳐나고 따뜻해 보였는데…나는 그 때 많이 추웠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떠나 보내야 했어.”

누군가의 봄은 생명과 시작과 설렘이지만 누군가의 봄은 죽음과 끝, 채워지지 않는 기다림일 수 있겠구나. 봄은 늘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수많은 봄들을 보내며 나의 봄과 타인의 봄, 혹은 우리의 봄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이 쌓여가며 내가 새 봄마다 달라지는 걸 느끼겠다.

그리고 또 해마다 봄에는 연례행사처럼 새 꽃화분을 잔뜩 사들인다. 그러면서 아직 남아있던 집안의 화분들을 다시 보게 된다. 말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화분에 손톱만한 새싹이 올라와있다. 미안해, 니가 살아있었다는 걸, 니가 이렇게 힘을 다해 마지막 생명을 지켜왔다는 걸 무심한 내가 몰랐구나. 화사하게 피어난 새로운 생명에만 희망이 있는게 아니었구나. 다시는 잊지 않을게. 다시 돌아오는 봄은 꼭 같이 맞을게. ●

이윤정 : 칼럼니스트. 사소하고 소심한 잡념에 시달리며 중년의 나이에도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것 같아 고민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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