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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왕손후예 서일본 200년 지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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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4, 5일간 산구시의 대내(오우치)씨 유물· 유적을 찾아다니다 보니, 시가지가 하나의 공원을 이룬듯 했다. 북쪽과 동서 삼방을 산이 둘러싸고, 남으로 평야가 펼쳐진 산구시의 분지는, 문자그대로 산의 출입구를 이루는듯 했다. 지명 「산구」는 지형을 잘 드러 내고있었다. 감야천 (후시노가와)이 이를 감싸 부채모양을 이루는 그 산하며 경관은 참으로 아름답다. 산구분지를 둘러싼 산은 높은 곳이라도 7백m정도이나, 능선의 부드러움, 빽빽하게 들어찬 소나무의 푸르름과 조화를 이루어 참으로 수려하다.
안개나 아지랭이가 끼는 아침이면, 이 고장이 낳은 화가 설주의 유명한 「사계산수도」를 연상케 한다고 산구사람들은 자랑하고 있다.
이 아름다운 경승의 땅 산구를 근거지로 하여, 일본서해에 웅비했던 백제왕손의 후예인 대내씨가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시기는 14세기 중엽부터 약2세기에 걸친 동안이었다.
당시 일본의 정세는 족리(아시카가)란 무장이 국가전권을 장악, 경도(교토)의 실정(무로마치)에 막부(바쿠후)를 두고 다스리던 때로 역사상 실정시대 (1336∼1573년)라고 한다. 이때 경도의 황실은 다만 종교적· 정신적인 권위에 불과하였고, 족리막부도 아직 그 지배력이 전국에 미치지 못했다. 각 지방에는 수호대명 (슈고다이묘, 지방영주)들이 토지를 함부로 분배하여 웅거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같은 시기의 이탈리아와 비슷하다. 로마에 교황이 있고, 각지에 도시국가가 난립했던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의 재판이라 할 수 있다. 대내씨는 상업도시인 박다(하카다)를 끼고 대외무역을 활발히 함으로써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중앙정부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데다가, 그 여력으로 서일본에 경도문화를 이식· 육성하여, 정치· 문화면에 있어서 경도를 능가하게 된 것이다.
대내씨의 조상은 백제 25대 성왕의 세째 왕자인 임성이다.
그는 611년 일본뢰호내해(세토나이카)서부에 있는 주방(수오) 다다량(다다라) 해안에 상륙했으며 그후 길부군대내(요시키군오우치)로 옮아와 토착했다.
그 자손은 대대로 이어오면서 다다량을 성(가바네, 계급적 칭호)으로 대내를 씨로 삼았다.
일본측 기록은 임성대자가 일본에 온 까닭을 이렇게 전하고있다.
당시 일본의 대화(야마토) 조정에는 용명천황에 이어 왕후인 추고가 왕위에 올랐는데 이를 섭정코자 성덕대자가 받들어 불교이념을 바탕으로 보다 발랄한 국가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임성은 성덕대자를 돕고자 일본에 왔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임성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왕자가 일본에 건너오던 당시 백제의국정은 매우 불안한데다 신라와의 충돌이 잦아 국기가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554년 신라와 관산성(지금의 옥천)의 싸움끝에 전사했고 성왕의 맏아들인 위덕왕도 신라와 싸워 불리했던데다 둘째아들 혜왕, 그의 아들 법왕은 모두 재위 2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다음을 이은 무왕때도 신라와의 관계는 험악했다. 이같은 시국에서 왕위에 오를 희망이 없었던 임성은, 신천지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대화조정의 용명과 추점 두 천황은 모두 소아(소가)씨 혈맥이다. 소아씨는 백제에서 망명해 온 개로왕의 신하 목소만치의 후손으로 천황과 더불어 성덕대자는 완전한 백제계출신 이었으므로 성덕이 임성을 따뜻하게 맞았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산구에서는 현재 방부(보후)시 우전에 있는 대일점분이 이 왕자와 관련이 있지 않은가 추정하고 있다. 또 산구시 대내의 승복사에 왕자의 공양탑이 있고, 왕자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흥강사(산구시 빙산)가 남아있다.
대내씨가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은 16대 성방(모리후사)때, 주방(수오)의 지방관으로 임명됨으로써 시작됐다. 그후 대대로 이 직책을 세습했다. 남북조 시대 (남과 북메 두 조정이 병립하던 때, 1336∼1392년)의 내란당시엔 남쪽조정에 속해 있으면서 주방일대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후 실정막부(무로마치바쿠후)에 큰공을 세우자 주방뿐 아니라 장문(나가도, 산구서북) 석견(이와이, 도근현서부)등 서일본의 6개국의 수호(지방장관)이 되었다. 이렇게 세력을 넓혀 나가던 중, 26대 성견(모리하루)에 이르러서는 중국과 북구주에까지 손아귀에 낼게되었으며 30대 의흥 (요시오키), 31대 의륭(요시다카)에 이르러 세력은 절정에 올랐다.
그러나 1551년 동족인 도청현(수에하루카다)의 반역으로 의륭은 마침내 자살하게 되고 그뒤를 의장(요시나가)이 이었으나, 1557년 새로운 지배자 모리(모리)씨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대내씨가 서일본에 군림, 권세를 마음껏 누리던 최후 2백년간은 대내씨의 실력이 중앙정부에도 압박을 가하는 기세였으며 이같은 세력구축의 원동력은 뇌호내해 서부일대의 지리적 조건이 가져다 준 해상경제의 이득을 독차지한데 있었다. 이 일대는 14세기 중엽부터는 왜구라 일컫는 해적의 만행이 극성을 부리는 진원지가 됐다.
그통에 한반도의 삼남과 경기·강원 양도가 습격당하고 그 피해는 중국연안에까지 미쳤으며 고려와 원이 망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해적의 주요 근거지는 관문해협에서 방장(주방과 장문)에 걸친 해안과 섬들이었는데 대내씨는 사실상 그들의 지배자였으며 해적이 강탈해온 물품을 처분, 이익을 독점했다. 해적의 활동이 수그러들고 국제적 통상이 정상화되자 대내씨는 또한 명과 조선간의 교역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특히 조선조정과의 무역에선 대내씨조상이 백제왕손임을 앞세워 교섭했으며 그로 인하여 딴 무역상들에게는 제한을 두었을 때도, 조선조정은 대내씨에게만은 통신부라는 일종의 허가증서를 주어서 특별대우를 했다.
이같이 해상경제로 얻은 막대한 재력으로 정부에 호감과 신임을 얻게 되었을뿐 아니라, 문화면에도 중앙의 경도문화를 능가하는 산구문화를 형성했다.
대내씨가 처음엔 남조에 충성을 바치다가 24대 대내홍세(히로요)에 이르러 경도의 막부편에. 가담하니, 막부는 그에게 주방· 장문의 수호(장관)로 삼았다. 1363년 홍세는 경도로 올라가 막부의 장군인 족리의전(아시카가·요시아키라)을 배알했다. 그때 그는 막부에 있는 고관은 물론, 거기에 있는 하급관리와 연극배우들에게까지, 가지고 간 수만 전화와 중국서 들여온 갖가지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주어, 그의 명성이 장안에 떠들썩 했다한다.
이같은 사실은 『대평기』라는 당시의 전쟁소설에 적혀있다. 여기서 말하는 전화가 중국돈이라는데, 대내씨의 재원이 어떠했던가를 짐작케 한다.
이같이 재력으로 중앙정부에까지 명성을 떨치는 동시에, 여력으로 문화적 사치에 있어서도 눈부시 자취를 남겨 놓았다. 홍세는 경도의 귀족문화를 동경한 나머지, 자기가 근거지로 하는 산구를 제2의 경도로 꾸미고자 시가지며 저택에서 신사와 사찰등에 이르기까지 경도를 모방한 건설계획을 세워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대내씨는 대륙과의 교류와 국제적인 안목으로, 마침내 경도를 능가하는 산구문화를 형성한 것이다. 탑중의 한 예로, 산구시 향산정에 서있는 유리광사의 오중탑은 26대 성견(모리하루)가 건립한 것으로 높이 31.2m에 회지즙(노송나무껍질로 이음)의 귀중한 탑으로 지금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명나라의 문인이요 화가인 조질을 초청해 문학적 교류를 꾀하는가 하면, 중앙 가단의 중진들을 불러 일본의 전통 가요인 화가· 연가등의 노래 모임을 자주 열었고, 당시의 가요집도 여러권 출판해 오늘날까지 전한다.
또 이 지방 출신 화가 설주(1420∼1487년)를, 그들의 무역선 견명선에 싣고 명나라에 유학 보냈는데, 설주가 귀국한 뒤 그린 수묵화 「사계산수도」는 국보로 지정될 만큼, 일본미술계의 걸작이다.
대내씨는 역대로 학순백에서도 큰 공헌을 했다. 불교에 심취하여, 천태· 진언등 귀족불교를 신봉하면서 전국 사원의 고승을 청해서 강좌를 자주 열었다. 또 조선에 사절을 파견할 때마다 대장경을 간청해서, 전후 11질을 가져갔다.
31대 의륭은 1536년 우리나라 중종에 사절을 보내어 문적을 청했다. 의륭은 편지에서 일본에 문헌이 부족하여, 학문을 닦는데 큰 지장이 있으니, 부디 많은 책자를 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이를 본 중종은 의륭에게 국서를 보내고 (이 국서는 지금 방부시모리보공회에 보관돼 있음) 의륭의 호학을 기리고 장려했으며 또 『시경』 『서경』과 함께 누각기를 보냈다.
의륭은 많은 문적을 인쇄, 골고루 폄으로써 의륭시대야말로 대내문화가 최고조에 달한때 있다. 그는 1542년 대재대이 (구주에 둔 대화조정의 총독부의 취관)에 임명되어 재임중 반란군을 토벌하다가 실패하자. 관직을 그만두고 산구의 거관 (거처하는 집)에 돌아와 오로지 유학· 신도· 한시문· 화가· 능악(노가쿠 가며극)등 학문과 예능에 몰두하는 나날을 보냈다.
대내문화 가운데 이국적인 정서가 풍부한 특색 한가지는 기독교를 허용한 것이다. 1549년 스페인출생의 기독교 선교사인 「프랑시스코·사비에르」(Francisco de Xavier)가 녹아도(가고시마)에 상륙, 약1년간 머무르다가 상경차 가던 도중 1550년11월 산구에 들렀다. 「사비에르」 일행은 거기서 대내의륭을 만났으며 의강은 그들로부터 항해며 인도 유럽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우상숭배와 남색에 미치자 격노케하여 그들 일행이 포교의 허가까지 얻지는 못했다.
한달뒤 「사비에르」는 경도로 갔으나 싸움에 황폐한 서울의 모습에 실망, 겨우 열하루를 머무른 끝에 다시 산구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법복을 입고 시계· 안경· 소총·망원경등 13종의 선물을 가지고 다시 의륭을 만났다. 그는 이들 이국인을 환대했으며 이어 전도를 허락했다. 시민에게는 방해하지 말도록 시달하는 한편, 그들의 숙소겸 설교장소로 대도사를 제공했다. 이것이 일본에서는 최초의 예수교당이 된 것이다.
이 역사적인 장소엔 1926년에서야 「사비에르」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지금은 「사비에르」공원이 되었다. 대내의장이 내린 포교의 허가장(재허상)의 비석이 함께 서있다. 「사비에르」는 반년간 포교하여 약5백명의 신자를 얻었다. 그가 고향에 보낸 편지에는 『이곳의 호수는 1만을 넘고, 가옥은 모두 넓고 크다』라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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