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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에 외면당한 태극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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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경호 기자 중앙일보 광주총국장
최경호내셔널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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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오전 11시30분 광주광역시 동구 옛 전남도청 분수대 앞. 박근혜 퇴진 광주시민운동본부 회원 50여 명이 손에 태극기를 든 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촉구했다. 이들이 “박근혜 탄핵 즉각 인용”을 외칠 때마다 태극기와 노란색 리본이 함께 흔들렸다. 탄핵 반대를 주장하는 태극기집회와 구분하기 위해 집회 참가자들이 태극기에 노란색 리본을 매단 것이다. 이날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도 탄핵 반대 집회를 벌인 국민저항본부 측과 구분하기 위해 노란색 리본을 단 태극기가 등장했다. 박근혜 퇴진 광주시민운동본부 관계자는 “탄핵 반대 집회로 오해받아선 안 된다는 의견이 많아 할 수 없이 태극기에 리본을 매달았다”고 말했다.

태극기가 탄핵 정국 속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최근 태극기가 탄핵 반대 집회의 상징물처럼 사용되면서 태극기를 드는 것 자체가 ‘탄핵을 반대한다’는 뜻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실제 올해 3·1절 기념일에는 태극기를 나눠주거나 집에 국기를 다는 것을 주저하는 현상이 전국 곳곳에서 나타났다. 광주광역시는 3·1절 기념 타종식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아리랑을 부르는 행사를 검토했다가 최근 백지화시켰다. 참가자들에게 태극기를 무료로 나눠줬다가는 자칫 “탄핵 반대 집회를 하고 있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날 광주 금남로 행사에 참가한 독립유공자 후손과 시민 등 200여 명은 태극기 없이 33차례의 타종행사로 독립정신을 되새겼다. 충남 천안시도 지난달 25일 신부문화공원의 3·1절 기념행사에서 태극기 퍼포먼스를 없앴다. 천안시는 매년 이 행사 때 태극기를 나눠주고 퍼포먼스를 했지만 올해는 취소했다.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날 신부문화공원을 찾은 시민들은 만세삼창 플래시몹과 카드섹션 등을 통해 천안 출신인 유관순 열사를 기렸다.

각 가정의 대문 옆이나 베란다 창가에 내걸렸던 태극기도 올해는 눈에 띄게 줄었다. 정희찬(56·전남 순천시)씨는 “태극기를 거는 것 자체가 마치 탄핵을 반대하는 것으로 오해받을까 봐 걸지 않았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탄핵 정국이라 하더라도 일부러 태극기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태극기는 3·1절을 비롯한 독립운동부터 월드컵에 이르기까지 민족과 나라를 하나로 묶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서이종 서울대(사회학과) 교수는 “특정 집단의 도구화 때문에 태극기를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며 “국민 통합의 원동력인 태극기의 힘을 활용해 현재의 사회 분열을 봉합하려는 열린 자세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경호 내셔널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