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장관회담 3일 전, 외교부 ‘부산 소녀상 옮겨라’ 공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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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가 부산의 지방자치단체 등에 부산 일본 총영사관 앞 소녀상(사진)을 사실상 이전해 달라고 요청하는 공문을 보낸 것으로 나타나 논란이 일고 있다.

“공관 앞 위치 바람직하지 않아” #시·동구청 등에 지난 14일 발송 #사실상 이전 요청 뒤늦게 알려져 #구청 “원한다면 외교부가 해라”

23일 외교부 당국자에 따르면 외교부는 지난 14일 부산시청, 부산 동구청, 부산시의회에 공문을 발송했다.

공문에는 “소녀상 위치가 외교공관 보호와 관련한 국제 예양과 관행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입장하에서 위안부 문제를 역사의 교훈으로 오래 기억하기에 보다 적절한 장소로 옮기는 방안에 대해 정부·지자체·시민단체 등 관련 당사자들이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일본이 부산 소녀상을 철거하기 전에는 일시 귀국시킨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대사를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는 상황을 풀어보려는 셈이다. 공문을 보낸 날은 독일 본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외상이 양자회담을 하기 사흘 전이었다. 한국 측은 회담에서도 정부가 지자체에 공문을 보낸 사실을 소개했다고 한다.

외교부 당국자는 “대사 소환은 일본 정부가 취한 조치로, 한국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도 그쪽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며 “공문을 보내고 공관 앞 조형물 설치가 적절치 않다고 밝힌 것은 원칙을 지키는 수준에서 우리가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을 하는 것이지 나가미네 대사를 돌려보낼 계기를 마련해주려는 취지는 아니다”고 해명했다.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23일 정례 브리핑에서 “소녀상은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설치한 것으로 정부가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적절한 장소로 소녀상을 옮기는 방안에 대해 지혜를 모으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외교공관 앞에 조형물이 설치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그는 “서울 소녀상도 같은 입장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회담서 일본 측에도 공문 보낸 사실 밝혀

부산 동구청은 이전 불가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박삼석 구청장은 “외교부가 소임을 다하기 위해 소녀상 이전 공문을 보낼 수 있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동구청이 소녀상을 이전할 수도 없고, 이전할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소녀상 이전이 가능했다면 소녀상을 설치할 때 이를 묵인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소녀상 이전을 원한다면 외교부가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소녀상을 지키는 부산시민행동’은 “일본이 초·중학교에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가르치라는 학습지도 요령을 고시한 날(지난 14일) 외교부는 일본 영사관 앞 소녀상 이전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며 “외교부는 어느 나라 정부냐”고 비판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유지혜 기자, 부산=이은지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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