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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보다 정부·국회를 더 압박하는 청원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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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지난해 런던 회사에 비정규직으로 들어간 니콜라 토프. 그는 업무 때 하이힐만 신으라는 회사 측 요구를 거부하고 검정 플랫슈즈를 신겠다고 했다가 쫓겨났다. 억울해하던 그는 영국 의회에 청원을 냈다. 근무 복장 규정이 성차별적이라는 이유였다. 청원에 15만2000여 명이 지지 서명을 했다. 정부 양성평등실은 “복장 규정은 합리적이어야 하고 남녀에게 요구하는 사안이 평등해야 한다는 양성평등법 위반”이라고 밝혔다. 의회는 토론을 거친 뒤 직장여성들을 조사해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결과 여성들은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라고 요구받거나 더운 날 헐렁한 옷을 입었다가 비난받았다고 하소연했다. 법 위반 시 벌금을 대폭 올리자는 논의가 제기됐다.

국민의 고충이나 불만이 정부와 의회를 거치면서 해결책 모색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모습이다. 의회 홈페이지를 통해 누구나 제기할 수 있는 청원제도 덕분이다. 영국 국민이나 영국 거주자들은 이름과 e메일 주소, 우편번호만 입력하면 청원을 올릴 수 있다. 서명하는 이들도 같은 사항만 써넣으면 된다. 1만 명 이상이 찬성하면 정부가 의무적으로 입장을 내야 하고, 10만 명이 넘으면 의회가 공식 토론을 해야 한다. 토론은 온라인으로 중계되고, 언론은 일련의 과정을 계속 보도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민정책에 대해 런던 중심가에서도 비난 집회가 있었지만 세계의 이목을 끈 것은 청원이었다. 그의 국빈방문을 막자는 청원에 185만8700여 명이 서명했다. 엄청난 규모에 놀란 외무부가 “강한 의견을 정부는 잘 인식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어 테리사 메이 총리가 “양국 관계를 고려해 예정대로 진행돼야 한다”고 설득하느라 진땀을 뺐다. 영국 의회는 20일 이 문제를 놓고 의사당에서 토론을 벌였다. 미 백악관도 30일 동안 10만 명 이상이 서명하면 정부의 입장을 정리해 공표하는 청원제도를 운영한다.

이 같은 시스템은 대의민주주의에서 정부나 의회가 주권자인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청원제도는 딴 판이다. 헌법과 국회법 등에 담겨 있긴 하지만 국회에 청원하려면 의원의 소개를 거쳐야 한다. 일반 국민이 국회의원과 안면을 트기도 어렵거니와 청원을 내봐야 정부나 국회에 지워지는 의무사항도 없다. 거리에서 진행되는 주요 서명이 100만 명을 넘기도 하지만 국가 기관들은 듣는 척도 안 한다.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국민의 불만은 해소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을 앞두고 횃불 같은 민심은 거리로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찬반의 간극도 크다. 국민의 목소리를 국정과 입법 등에 반영하는 통로는 막아놓고 선거 때만 서로 표를 얻으려 해 온 결과다. 대선을 앞두고 “내가 대통령이 되면 지금과 다를 것”이라고 말할 일이 아니다. “내가 아니라 누가 돼도 국민의 요구를 듣고 반영할 수밖에 없는 제도부터 만들자”고 해야 한다. 영국 의회에는 트럼프의 국빈방문이 필요하다는 청원도 제기돼 있고, 31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

김성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