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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컬렉션 휩쓴 '반(反) 트럼프' 패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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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뉴욕패션위크에 참석한 모델 아이린이 SNS에 흥미로운 사진을 올렸다. 아찔한 하이힐, 무심히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 선글라스 너머 당당한 눈빛이 느껴지는 모델 7명이 뉴욕의 마천루를 배경으로 나란히 걷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런웨이를 도시 한복판으로 옮겨온 듯하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패션계에서 남들과 똑같이 옷을 입는 건 ‘절대금지’ 사항인데, 사진 속 모델들은 하나같이 같은 디자인의 티셔츠를 입고 있다. 자세히 보니 티셔츠에는 ‘여성이 미래다(The Future is Female)’ ‘나는 이민자다(I Am An Immigrant)’ 같은 문구들이 적혀있다. 패셔니스타에겐 무덤과도 같은 유니폼 류의 옷을 입고도 저들이 당당할 수 있는 이유다.

사진 속 티셔츠를 만든 주인공은 여성의류 디자이너 프라발 구룽(Prabal Gurung)이다. 자신의 이름과 같은 브랜드를 운영하는 그는 이번 시즌 테마를 ‘여성’이라고 밝혔다. “제 영감의 원천인 여성은 내적인 아름다움과 힘, 우아한 여성미, 그리고 기준을 구분할 줄 아는 경계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러한 여성을 축복하기 위해 우리는 의식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신념을 밝히고 목소리를 높여 변화를 준비할 때”라고 말했다. 그의 패션은 ‘트럼프’라는 퍼즐 조각을 대면 컨셉트가 더 확실히 이해된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미스 유니버스 성희롱 논란과 ‘여성의 성기(pussy)’ 발언 등 강도 높은 여성 비하 언행을 일삼는 성차별주의자 대통령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프라발 구룽의 ‘반(反) 트럼프’ 주장은 단순히 ‘성차별’에서 그치지 않고, 미국 전역에 논란의 불을 지핀 이민법 행정 명령과도 맞닿아 있다. 구룽의 쇼는 ‘여성이 미래다(The Future is Female)’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시작으로 ‘장벽을 무너뜨리자(Break Down Walls)’ ‘나는 이민자다(I Am An Immigrant)’ ‘국경 없는 혁명(Revolution Has No Borders)’ 등의 문구로 이어졌다. 쇼의 마지막에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모델이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We Will Not Be Silenced)’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등장해 다시 한 번 강렬한 저항정신과 결속력을 주장했다.

‘반 트럼프’ 외침은 구룽 뿐 아니라 뉴욕패션위크 전체를 휩쓴 듯하다. 브랜드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은 앞뒤로 ‘미국을 뉴욕처럼(Make America New York)’ ‘44 1/2’이 적힌 빨간색 야구 모자를 선보였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쓰는 똑같은 색과 디자인의 모자에 그의 슬로건이자 국정기조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n Great Again)’를 명쾌하게 비꼰 문구를 적은 것이다. 그렇다면 ‘44 1/2’이라는 문구는? 트럼프가 제45대 미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을 떠올리면 의미가 읽혀질 것이다.

악동 디자이너 제레미 스캇(Jeremy Scott) 역시 ‘텔레비전에서 본 것처럼(As seen on TV)’ 문구가 적힌 탱크톱을 선보였다. 그는 마이클 잭슨과 예수의 이미지를 가져온 것은 물론이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키는 가죽 옷과 마릴린 먼로의 유명한 드레스도 차용했다. 스캇은 “우리가 얼마나 연예인에 집착하는지 그래서 종국엔 엘비스와 예수, 마릴린 먼로, 마이클 잭슨 모두를 동급으로 취급하게 되는 현상을 생각해 봤다”며 “그것이 우리가 지금 대통령이 아닌, TV에서 늘 소비하던 연예인 그것도 대장급 연예인을 갖게 된 이유”라고 말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뉴욕패션위크에서 무엇보다 가장 기대감이 높았던 쇼는 래퍼 칸예 웨스트의 이지 시즌5(Yeezy Season 5)였다. 웨스트는 지난해 말 콘서트에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은 물론 실제로 그와 만나기도 해 친(親)트럼프 인물로 분류돼 왔다. 하지만 패션쇼를 일주일 앞둔 지난 월요일 트럼프와 관련된 자신의 모든 트윗을 삭제해 그의 정치적 입장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인지 화제가 됐다. 이와 관련한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은 상태라 15일 열린 그의 쇼가 작게나마 힌트를 줄 거라고 기대했다. 역시나, 그의 쇼는 명쾌한 답을 보여줬다. 히잡을 쓴 무슬림 모델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트럼프가 발행한 7개 무슬림 국가 국민 입국금지 명령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현한 것이다.

웨스트의 런웨이에 선 무슬림 모델은 하리마 아덴이다. 그는 미스 미네소타로 선정된 바 있으며, 당시 대회에서도 수영복 대신 부르키니를 입고 히잡을 두른채 참가해 화제가 됐다. 2016년 9월 무슬림 디자이너 애니사 하시부안(Anniesa Hasibuan)이 모든 모델들에게 히잡을 입혀 컬렉션을 선보인 적은 있지만 모델 개인이 런웨이에서 종교적 신념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웨스트는 아덴을 자신의 런웨이에 데뷔시킴으로써 아덴과 자신의 반 트럼프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 외에도 반 트럼프 정신은 뉴욕패션위크 곳곳에서 나타났다. 디자이너 마라 호프만(Mara Hoffman)은 런웨이에서 인권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안젤라 데이비스 등의 연설을 낭송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무대에서 연설을 읽은 이들은 트럼프 반대 시위를 집행한 여성행진(Women’s March)의 의장들이었다. 트레이시 리스(Tracy Reese) 역시 여성 시인들을 초청해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시를 낭송하게 했다.

이자은 인턴 기자 catmilkz@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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