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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때문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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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쿠웨이트의 새 국왕 셰이크 사바 알아마드 알사바(76)는 1963년부터 2003년 총리가 될 때까지 40년간 외무장관을 지냈다. 왕족이 고위직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왕의 나라'에선 드문 일이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82) 국왕은 63년부터 왕위에 오른 지난해까지 40년 넘게 국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동생인 술탄(78)은 62년부터 왕세제가 된 지난해까지 43년 동안 국방장관으로 일했다. 53년 농업부를 시작으로 통신부 등을 거치며 장관직을 50년 이상 수행했다. 술탄의 아들인 반다르(56)는 83년부터 지난해 7월 국가정보원장을 맡아 귀국할 때까지 22년간 주미대사로 일했다. 서구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절대왕정이지만 풍부한 석유로 벌어들인 달러 덕에 복지혜택 등 내정이 안정됐기에 이런 장기재임이 가능했지 싶다.

석유 때문에 이렇게 안정을 구가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국난을 당하기도 한다. 90년 이라크에 침략당한 쿠웨이트도 있지만 동티모르의 경우는 한결 눈물겹다. 400년 가까이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던 동티모르는 75년 11월 독립을 선언했지만 2주 만에 인도네시아에 점령당했다. 영국 석유회사인 버마오일이 동티모르와 호주 사이의 티모르해에서 발견한 막대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외침을 불렀다는 분석이다. 78년 호주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동티모르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주권을 인정했다. 그 대가였는지 인도네시아는 89년 티모르해 유전 개발권을 호주와 나눠 가졌다.

그 뒤 유엔이 개입해 인도네시아의 철권통치는 99년 막을 내렸지만 동티모르 '진실과 화해위원회'가 20일 유엔에 제출한 인권유린 보고서에 따르면 그동안 18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그러나 동티모르의 사나나 구스마오 대통령은 가해자를 용서하기로 했다. 진실을 규명하되 처벌은 원치 않는다고 밝혔다. 경제적으로 인도네시아의 협력이 절실했기에 나라의 장래를 위해 과거사 한풀이를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구스마오는 사실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달인 2002년 5월 발 빠르게 호주와 티모르해 석유.천연가스 개발 협약에 서명했다.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뭘 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지도자로 보인다. 바닷속에 묻힌 에너지 자원을 외침을 부른 독약에서 나라와 국민을 살리는 치료약으로 바꾸는 구스마오의 솜씨를 기대한다.

채인택 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