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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철벽 국경 장벽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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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호 28면

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현명한 정책으로 오현제의 하나로 꼽히는 트라야누스(재위 98~117년)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다. 세금을 줄였고 공공사업을 진흥했다. 빈민 구제에 힘쓰고 공설시장을 증설해 시민의 공감을 얻은 황제로 통한다. 원로원과의 관계도 중시했다. 시민과 원로원이 따르니 원정을 쉽게 승인받을 수 있었다.


후임인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년) 때가 되자 변경이 삐걱거렸다. 영토 확장을 중단하고 변경 속주 방문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고비용의 군단 확대보다 로마의 특기인 기술공학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122년 브리타이나(지금 영국)를 찾은 그는 섬 북부에 동서로 길이 117.5km의 석벽을 쌓도록 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하드리아누스 장벽이다. 128년 완공된 장벽은 바깥쪽부터 방어용 도랑, 성벽, 군용 도로, 1차 보루, 참호, 2차 보루 등으로 이뤄진 정밀 방어진지다.

그를 이은 안토니우스 피우스(재위 138~161년)는 142년 장벽 북쪽으로 진출해 길이 63km의 안토니우스 장벽을 새롭게 쌓았다. 하지만 국력이 받쳐주지 못해 불과 23년 뒤 원위치로 퇴각했다. 383년 서로마 황제 마그누스 막시무스(재위 383~388년)가 브리타니아에서 군단을 뺀 뒤 로마인들은 겨우 27년 만인 410년 쫓겨났다. 주변 민족과의 교류와 협력, 주민의 충성,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토목 구조물은 한낱 돌더미에 지나지 않았다는 교훈이다.

이런 역사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나라와 사람이 현대에도 적지 않다. 이스라엘은 2002년부터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인 요르단강 서안에 콘크리트 분리장벽을 건설하며 현지 주민을 고립시키고 있다. 2000년 9월 2차 인티파타(팔레스타인 봉기)를 계기로 총 길이 708km의 장벽을 세우기로 했다. 이스라엘은 보안장벽·안보장벽·반테러장벽이라며 필요성을 주장한다. 자살 공격이 2000~2003년 73건 있었지만 분리장벽이 일부 설치된 2003~2006년엔 12건으로 줄었다고 옹호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새로운 게토(과거 유럽의 차별적인 유대인 분리거주 지구)의 성벽이나 다름없다며 비인간성을 지적한다. 분리장벽은 글로벌 인권문제로 불거져 2004년 국제사법재판소가 부당성을 지적하며 건설 중지를 권고했지만 이스라엘은 귀를 막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2014년 9월부터 이라크 국경을 따라 길이 814km의 콘크리트 장벽을 건설하고 있다. 현재 국왕인 살만이 국방장관이던 시절 시작했으니 '로열 프로젝트'다. 5겹 방호벽에 첨단 전자 방호 시설을 결합했다. 지상에는 20km마다 감시 레이더가 설치됐다. 장벽 상부에는 카메라와 열상 탐지기가, 하부에는 동작감지 센서 등이 각각 가동된다. 체온이 있는 생물이 접근하면 총알이 빗발친다. 하늘에는 정찰기와 무인 감시기가 돌아다닌다. 사우디는 예멘 국경에도 장벽을 설치하려다 예멘 정부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일시 중지 중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을 고집하면서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모든 장벽이 그렇듯 이 시설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대적 감정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을 존경과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와 제거 대상으로 나누기 때문이다. 불행을 부르는 철벽이 될 수 있다. 냉전 당시 먼저 베를린 장벽을 쌓아 세계를 동서로 나눴던 소련과 동독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잊었는가.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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