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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주말 태극기 집회와 촛불집회가 남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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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관기 변호사 도산법연구회 회장

김관기
변호사
도산법연구회 회장

지난 토요일 태극기 집회를 처음 보았다. 주로 나이 든 남자들이 확성기에서 퍼져 나오는 멸공의 횃불, 진군가 같은 군가를 따라 부르며 간간이 탄핵기각 구호를 따라 하고 있었다. 요즘 세상에 시내 한복판에서 군대 병영에서나 듣는 행진곡은 무엇이며, 한국 사람 집회에 대형 성조기의 등장은 또 무엇인지. 전직 대한변협 회장을 지낸 김평우 변호사도 연설을 했단다. 요지는 이게 다 공산주의 때문이고 박근혜 대통령 개인에 대한 탄핵이 아니고 대한민국에 대한 탄핵이며, 최순실을 둘러싼 하찮은 비리를 갖고 조중동 등 정통 언론과 KBS·SBS 같은 방송들이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음모라는 주장이다. 자신은 따뜻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골프나 치면서 지내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70년 전에 세운 근대국가를 망치려는 음모에 맞서기 위해 왔다는 이야기다. 김 변호사는 사법권의 행사도 비판했다. 헌법재판소가 일주일에 두 번 재판하며 어려운 탄핵 사건을 빨리 끝내겠다는 게 말이 안 되고 일개 부장검사가 대통령을 형사 입건한다는 것도 불경스럽다는 지적이었다.

국정 농단 ‘하찮은 비리’ 동의 못해
촛불집회 “염병하네” 연호가 와 닿아
잦은 사법부 앞 위력시위 자제하고
법과 원칙, 양심 따른 판결을 기대

박 대통령 개인 숭배는 그분의 생각이니 그렇다 치고, 글쎄 그것이 하찮은 비리이던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난가을 이래 몇 달 동안 최순실증이라는 허탈감에 빠져 있다.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도대체 “이게 나라인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김 변호사 말대로 한두 명의 하찮은 비리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나라의 기강을 허물어 버렸다. ‘비밀이 시작되는 곳에 권력이 있다’고 스탈린 체제를 비판하는 전체주의 연구자가 말한 적이 있다. 그걸 우리나라에서 보게 되다니. 장관은 자기 부처 과장 인사도 못했고 대국민 담화 하나 못 내서 일반 국민은 누가 장관인지도 잘 몰랐다. 그런 분위기에서 청와대 명령이 없는데 어느 공무원이 움직이겠는가. 그런데 막상 그 안에서는 ‘서면 보고’만 있었다는 것이니 말이다. 세월호 시위가 계속되는 것은 국가에 대한 믿음이 여객선과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던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바른말은 “염병하네”로 유명해진 청소 아주머니가 같은 날 촛불집회에서 했다. “한두 사람 때문에 우리가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최순실이 강제 구인되며 억울하다고 외치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소리가 나왔다”면서 “60이 넘어서 청소를 하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고 세금 내고 사는데 잘난 사람들이 나라를 망하게 하고도 반성이 없다”는 말은 그야말로 ‘사이다’ 아니겠는가. 참가자들이 연호하는 “염병하네” 소리가 지금도 귀를 친다.

지난가을부터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결국 국회를 움직였다. 눈치 보던 정치인들은 물론, 한두 사람에게 꽉 잡혀 옴짝달싹을 못하던 검찰도 변하게 했다. 탄핵이 그것이고 특별검사가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안심하지 못한다. 마음의 상처가 너무 깊기 때문이다. 법원의 판사도,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도 이 몇 명의 영향을 받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대중이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헌법재판소까지 행진을 해 위세를 보인 것도, 법원 정문 앞에서 변호사·법학교수 등 법률가들이 박 대통령 구속 촉구 집회를 연 것도 심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흔히 법관의 독립을 이야기할 때 행정부로부터뿐 아니라 여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한다고 하지만, 교과서적인 헌법해석론을 앞세워 사법관들 앞에 시민들이 나서지 말라고 하기엔 그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너무나 망가진 것도 사실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헌법재판관들과 판사들, 그리고 특별검사가 촛불집회에 참여한 대중의 시위 때문에 무서워서 엉터리 수사와 재판을 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이 나라의 주류 신문사와 방송국이 사실을 날조했다는 황당한 주장이 나온 것을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통치자들에 대한 신뢰가 상실된 마당에 집회를 아예 그만두자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다만 최소한 재판관들이 심리적 압박 때문에 그렇게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구차한 변명 대신 시대의 양심을 걸고 그렇게 결정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헌법재판소나 법원 앞에서의 집회는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어떨까.

더 걱정스러운 것은 대통령 유고 상태가 지속되는 혼돈의 상황이다. 탄핵을 인용하는 데 반드시 뇌물이나 공갈죄 같은 범죄가 성립해야 하는 것도 아니므로 탄핵심판을 미룰 명분도 없다. 특별검사가 공소제기를 하기 위해 피의자들의 자백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이들이 구속돼야 하는 것도 아니다. 헌재는 빨리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고, 특별검사는 빨리 공소를 제기해야 할 일이다.

오히려 지금은 대통령 탄핵과 형사처벌 그 이상을 걱정할 때다. 새 대통령을 뽑는다지만 그것이 미인대회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 고르기에 불과하고 그 밥에 그 나물 식으로 비슷한 사람이 대통령 되는 식이면, 그동안 시민들이 투쟁한 성과는 도로아미타불이 될 것이다.

김관기 변호사 도산법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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