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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2월호] 하늘에 꽂힌 유학자 괴담 배상열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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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애 동안 천문학과 성리학 분야에 방대한 저술 남겨

1월 3일 오후 11시. 2017년 새해 밤 하늘에서 첫 우주쇼가 펼쳐졌다. 그때부터 4일 새벽 2시까지 별똥별이 비처럼 쏟아진 것이다. 천문대에서는 시간당 120개까지 유성이 관측됐다. 1월에 나타난 이른바 ‘사분의(관측기구 이름) 자리’ 밝은 유성우다. 이 유성우는 소행성(2003EH1)과 혜성(C/1490 Y1)의 잔해가 지구 중력에 끌려 떨어진 현상이다.

새해 벽두 하늘의 조화는 무슨 조짐일까? 최순실의 국정 농단으로 어수선한 정국에는 길조일까, 흉조일까? 요즘과 달리 옛 사람들은 하늘의 변화를 예사로이 보지 않았다. 그 뜻을 읽으려 했다. 신라시대에는 별을 관측하는 첨성대가 있었고, 조선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괴담의 7대손인 배기면 씨가 국학진흥원을 찾아 기탁한 혼천의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괴담의 7대손인 배기면 씨가 국학진흥원을 찾아 기탁한 혼천의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종택 지붕에 몰래 간직해온 <서계쇄록>
세종은 해시계·혼천의(渾天儀, 또는 선기옥형) 등을 직접 만들어 하늘을 관측했다. 하늘의 움직임은 곧 땅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의 유학자들이 천문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퇴계 이황(1501∼70) 을 비롯해 우암 송시열(1607∼69) 등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천문기기인 혼천의를 직접 만들어 천체 운행의 원리를 이해 하는 데 몰두했다. 형이상학에만 묻혀 지낸 문약(文弱)한 서 생이 아닌 과학자로 세상에 보탬이 된 것이다.

대학자뿐만이 아니다. 제자들도 영향을 받았다. 그런 분위 기에서 아예 천문 분야에 일가를 이룬 선비들이 나왔다. 대표적 인물이 괴담(槐潭) 배상열(裵相說, 1759∼89)이다. 초야에 묻혀 지낸 그의 이름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남긴 천문 분야 저작은 현대 과학자들도 그 수준에 놀랄 정도다. 생몰 연대를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30세로 요절했 다. 그가 짧은 일생 동안 그토록 천문에 파고든 까닭은 무엇 일까? 궁금증을 안고 괴담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

지난해 12월 28일. 경북 봉화군 봉화읍내에서 괴담의 7 대손인 배기면(57) 씨를 만나 괴담의 고향인 봉화읍 석평2리 유록마을로 들어갔다. 고개를 넘으면 나타나는 야트막 한 산으로 둘러싸인 40여 가구의 흥해(興海) 배씨(裵氏) 집성촌이다. 마을 입구에 ‘쌍절세향(雙節世鄕)’이라는 표석이 서있다. 임진왜란 당시 용궁전투에서 전사한 의사 배인길과, 비보를 듣고 자결한 부인의 충열(忠烈)이 서린 마을이다. 마을 한쪽에 쌍절려(雙節閭)가 세워져 있었다.

녹동이사는 나라가 괴담을 기려 세운 추모와 강학의 공간이다.

녹동이사는 나라가 괴담을 기려 세운 추모와 강학의 공간이다.

마을 가운데 ‘녹동이사(鹿洞里社)’라는 건물이 조촐하게 남아 있었다. 괴담은 일생을 학문에 몰두하고 글을 가르 치며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사후 문중과 유림이 상소해 나라에서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이라는 증직이 내려 졌다. 1831년 유림은 4대 봉사를 넘어 세세토록 제사 지내는 불천위(不遷位)로 괴담을 기렸다.

녹동이사는 1852년 나라가 지은 서원 같은 추모와 강학 공간이다. 후손 배씨는 “본래 강당과 동재·서재 등 건물이 모두 다섯 채였는데 대부분 허물어지고 지금은 녹동이사 하나만 남았다”며 “나머지 네 채의 현판은 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고 설명했다. 괴담 종택은 2002년 종택과 녹동이사 등에 전해 내려오던 혼천 의와 서책·목판 등을 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후손들은 유품을 용케도 지켜냈다. 대학교수 등이 소문을 듣고 녹동이사를 수 차례 찾았지만 종택 지붕에 보관해온 <서계쇄록(書 計?錄)> 등 서책은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종택은 “보여주면 없어진다”는 윗대의 당부를 철저히 지킨 것이다.

녹동이사는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으로 방이 배치된 구조다. 오른쪽에 괴담의 위패를 모신 감실이 있었다. 그 앞 공간에 목판이 쌓여 있었는데 모두 국학진흥원으로 옮겨졌다.
왼쪽 방과 마루는 서당 공간으로 활용됐다고 한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후손들이 글을 배우던 곳이다. 괴담은 한미한 집에서 자랐지만 5∼6세에 이미 글을 읽고 썼다. 11세에는 가르침을 받으러 한 스승을 찾아간다. 스승 은 그의 공부 수준을 알아보려고 글을 지어보라고 명했다. 그는 즉석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수토목금수 인의예지학(水土木金修 仁義禮智學, 수토목 금을 닦아 인의예지의 학문을 이루네).”

직방당 연못 주변에서 밤이면 별자리 관측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그의 짧은 시구에 유학이 추구하는 근본이 함축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부터 그는 신동으로 불렸다. 15세에는 당시 유학자들이 가장 어렵다고 여기던 <역학계몽(易學啓蒙)> <율려신서(律呂新 書)> 등 천문·역학 서적을 탐독한다. 그러면서 역법(曆法)인 상수학(象數學)에 조예가 깊어졌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는 천문이 필수과목으로 포함돼 있 었다. 하늘의 이치가 중시된 것이다. 무슨 까닭일까?

사서삼 경의 하나인 <서경(書經)>은 선비의 교과서나 다름없다. <서경>에는 요임금이 “일월성신을 보고 역상(曆象)을 파악해 백성들에게 때를 알려 주었고(乃命羲和 欽若昊天 曆象日月 星辰 敬授人時)” 순임금은 “선기옥형으로 칠정(해와 달과 오 행성)을 관측해 백성을 다스렸다(在璿璣玉衡 以齊七政)”는 기록이 나온다. 유학에서 요·순은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그래서 그들을 본받는 것은 곧 천도(天道)를 실현하는 왕도정치로 여겨졌다. 제왕이 천문현상을 관찰해 백성에게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는 까닭이다. 천상(天象)으로 천심(天心)을 읽어 천재지변을 막고 농사의 편의로 민심(民心)을 얻는다는 이치다. 조선시대 천문을 중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연스레 천체의 운행원리를 이해하는 혼천의가 발달했다.

봉화 녹동이사로 올라가는 길 아래편에는 길이 10m쯤 되는 작은 연못이 있다. 연못 한쪽에 ‘직방당(直方塘)’이라는 글자와 태극문양이 새겨진 표석이 있다. 괴담이 일영대(日影 臺)로 이름 붙여 해시계를 두고, 밤에 하늘을 관측했다고 전하는 장소다. 연못 주변에는 회화나무가 서 있다. 괴담은 회화나무 아래서 책을 읽고 제자들과 문답하며 달 밝은 밤에는 퉁소를 불거나 거문고를 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회화나무 괴(槐)’와 ‘못 담(潭)’ 자를 붙여 ‘괴담처사’로 불렀 다. 그의 호도 여기서 유래한다. 그는 혼천의를 제작해 천문 공부에 활용했다. 후손 배씨는 “표석 위치가 정남향”이라며 해시계와 천체 관측에 필요한 기준점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측 장소가 높은 곳이 아닌 주변보다 지대가 상대적으로 낮은 게 궁금했다. 현장을 조사 했던 이용복(67·천체물리학) 전 서울교대 교수는 “천체 관측 은 높이와 상관없이 시야만 트이면 된다”며 “괴담은 육안 관찰 결과를 혼천의를 통해 확인해봤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괴담이 만들었다는 혼천의의 실체가 궁금했다. 녹동이사에는 실물은 물론 복제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봉화를 찾아간 날 오후 괴담의 혼천의가 보관된 국학진흥원을 방문했다.
 봉화에서 안동 국학진흥원까지는 지름길로 30분 거리다. 괴담 당시에는 녹동이사 자리도 같은 안동부 땅이었다.

국학진흥원 수장고에서 괴담의 혼천의가 모습을 드러냈 다. 혼천의는 천체의 운행원리를 이해하도록 만든 천문기기다. 대나무·소나무·참나무로 동그랗게 환(環)을 만들어 여러 환이 지구처럼 구 형태를 이루고 있다. 붉은색 적도환과 노란색 황도환, 흰색의 백도환 등으로 구분돼 있다. 괴담은 특히 적도환 안쪽에 한지를 바르고 28수 별자리를 그려 놓았다.

국학진흥원 오용원 연구위원은 “그만이 시도한 3차원적 접근”이라고 의미를 설명했다. 또 십자 받침 아래엔 제작 내력을 적은 23자의 묵서가 적혀 있다. “기해년(1779년)에 처음 만들어 을사년(1785년)에 거듭 손질했다. 재목이 좋지 못하 고 솜씨가 용렬해 정밀하게 만들지 못했다. 뛰어난 솜씨와 좋은 재목을 기다려 고쳐 만들어야 할 것이다.” 괴담은 혼천의를 개선할 필요를 느끼면서 연구에 매달린 것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는 천문이 필수과목으로 포함돼 있었다. 무슨 까닭일까? <서경>에는 요임금이 “일월성신을 보고 역상(曆象)을 파악해 백성들에게 때를 알려주었고” 순임금은 “선기옥형으로 칠정(해와 달과 오행성)을 관측해 백성을 다스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괴담은 1774년 16세에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의 혼천의를 세심히 관찰한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자신의 혼천의를 만들 었다. 아쉽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5년 뒤 21세에 다시 혼천의를 만든다. 이게 국학진흥원에 보관 중인 혼천의다. 균일한 재료와 촘촘한 눈금까지 여간 정교하지 않다. 국학 진흥원은 혼천의를 기탁받은 뒤 훼손된 부품을 수리하고 그 사이 몇 차례 전시를 거쳤다. 혼천의는 현재 송이영이 만든 ‘자명종 혼천의’(국보 230호)와 송시열의 혼천의, 홍대용의 혼천의 정도가 남아 있다. 송이영의 혼천의는 특히 1만원권 지폐의 뒷면에 별자리와 함께 그려져 있다. 국학진흥원에는 맷돌처럼 생긴 괴담의 해시계도 보관돼 있었다.

삼각법 이용해 고도 측정하고 전답 면적 계산
괴담은 혼천의를 통해 천체주위도·일월십이회도·일장칠윤 도 등 천체 운행원리를 한 장의 그림으로 설명하는 다양한 도설을 남겼다. 수학인 산법(算法)에도 천착했다. 그가 남긴 <서계쇄록>에는 산법의 원리를 이용해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이 다양하게 실려 있다.

괴담이 낮에는 해시계로 시간을 재고 밤이면 별자리를 관측했다고 전해지는 연못 직방당(直方塘).

괴담이 낮에는 해시계로 시간을 재고 밤이면 별자리를 관측했다고 전해지는 연못 직방당(直方塘).

삼각법을 이용해 고도를 측정하고 전답의 면적을 계산하는 방법 등이다. 괴담의 천문 관련 저작을 검토한 이용복 전 교수는 “그의 이론은 현대 천문학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며 “천체 운행의 원리 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나름의 체계를 세운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특히 그가 남긴 독창적 도 설은 이해의 수준이 상당 하다는 걸 증명한다는 것이다.

1780년 괴담은 절간에 서 <주역>을 읽는다. 매일 한 괘를 넘지 않았으며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느라 밤에도 잠을 자지 않았다. 그러느라 몸은 쇠약해졌다. 괴담은 이렇게 천문학·역학·산법 등에 심 취했지만, 그때까지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것 이 늘 마음에 걸렸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괴담은 22세 때인 1781년 퇴계 학통을 이은 당대의 거유(巨儒) 대산 이상정(1712∼81)의 문하로 들어간다. 그때의 가르침은 ‘호상종 학록(湖上從學錄)’에 기록돼 있다. 처음 만난 스승과 제자의 문답은 이렇다.

괴담의 묘소. 유록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마을 건너편의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괴담의 묘소. 유록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마을 건너편의 산자락에 위치해 있다.

처음 배울 때 어떤 책을 읽어야 합니까? 힘을 쓰는 순서는 어떻습니까?(괴담)
“…먼저 <소학>을 읽어 근원을 함양하고 다음으로 <대학>을 읽어 규모를 정해야 하네. 또 다음엔 <논어><맹자><중용>을 읽어 인(仁)을 구하고….”(대산)
유자(儒者)가 학업 중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까?
“오직 의리의 학문은 평생 해야 할 사업이고, 과거에 응시하는 글도 버릴 수 없는 것이네….”
이 두 가지에 능하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둘 다 정밀하지 못할 것 같으면, 한 가지만 위주로 해서 오로지 힘쓰는 것이 낫네.”
글을 읽을 때 힘을 쓰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무릇 글을 읽을 때는 과정은 작게 노력은 크게 해야 하네. 20줄의 글을 읽을 수 있으면 다만 10줄만 읽고 그 10줄에 대해 맹렬히 공부해 자세하게 이해해야 하며….”
생각하는 것과 글 읽는 것 중 어느 것이 낫습니까?
“반드시 함께 나아가야 하네. 만약 읽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 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고, 생각만 하고 읽지 않으면 불안할 것이네. 반드시 읽고 또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읽어야 잊어버리 거나 위태로운 폐단이 없을 것이네. 그런 뒤에 학문이 진보할 수 있다네.”

대화 중 스승은 서가에서 <대학>을 뽑아 괴담에게 건넸다. 괴담은 사흘간 가르침을 받은 뒤 물러나와 바로 태백산으로 들어간다. <대학>을 파고들기 위해서였다. 이후 그는 사서(四書) 연구에도 일가를 이룬다. <사서찬요(四書纂要)> 등 저술이 대표적이다.

영양실조로 30세 요절했지만 방대한 저술 남겨
스승 대산이 세상을 떠나자 다시 소산 이광정(1714∼89)의 가르 침을 받는다. 1787년 스승 소산에게 올린 편지에 그의 공부 자세가 엿보인다.  “…근래에 지병이 고질화돼 뜻도 모르고 하던 독서를 그만두 었습니다…근자에 한두 사람과 더불어 <대학> 한 권을 통독하 고 있습니다.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 별지에 적어 아룁니다. 삼가 바로잡는 가르침을 입는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렇게 괴담은 마지막 8년을 성리학에 몰두했다.

 1789년 봄 그는 알성과에 응시하는 선비를 따라 한양으로 나들이를 한다. 과거시험은 보지 않았다. 그는 대신 한양의 풍물을 둘러봤다. 귀로에는 단양의 산수를 찾았다. 즐거운 여행이었다. 그러나 무리한 탓인지 집으로 돌아와 몸져 누웠다. 그는 죽음을 직감했다. 5리 밖 할머니를 찾아 마지막 인사를 하려 했지만 의관만 갖춘 채 힘이 부쳐 더는 일어서지 못했다. 괴담은 결국 서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 우주로 돌아갔다.

 괴담이 요절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는 연구나 글을 쓸 때는 언제나 몰입했다. 가난해 먹는 것은 변변치 못했다. 후손 배씨는 “괴담 선조는 한 번 글을 쓰기 시작하면 일주일씩 식음을 전폐하고 매달렸다고 전해 들었다”며 “그게 영양실조로 이어져 수명을 단축하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생애는 짧았지만 그가 <도학육도(道學六圖)> <서계쇄록> <계몽도해(啓蒙圖解)> <성리찬요 (性理纂要)> 등 천문학과 성리학 분야의 방대한 저술을 남긴 배경이다. 그는 그렇게 우주의 이치를 꿰뚫고 인간과의 합일을 꿈꾸었다.

새해 밤 하늘에 쏟아진 유성우에 이어 봄에는 혜성이 지나간다고 한다. 태양으로 접근하는 엔케 혜성이다. 또 우주에서는 혜성 탐사선 ‘스타더스트’가 총알보다 다섯 배나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다. 스타더스트는 1999년 지구를 떠나 18년째 비행 중이다. 스타더스트는 혜성에서 생명체 시료를 채취하는 임무 를 띠었다고 한다. 우주는 생명체가 없다면 공허할 뿐이다. 240년 전 괴담처럼 우주 속 한 생명체로 밤 하늘을 보며 다시 천심을 떠올린다.

녹동이사에 서린 '효'와 '선비정신'

'이웃과 화합하지 못하면 자신을 반성해야'
괴담은 일생 학문에 몰입했지만 사람의 도리를 실천궁행 하는 선비이기도 했다. 김진동이 쓴 행장(行狀)에 그의 성품이 잘 드러나 있다. 집안이 가난해 어머니가 옹기로 물을 긷자 “어찌 노모에게 이런 일을 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매일 새벽 일어나 그 일을 대신했다. 저녁에도 그랬다. 모친이 절구질을 하면 쫓아가 절구질을 하고, 불을 때면 쫓아가 불을 때곤 했다. 천성이 효자였다. 그러면서도 책을 끼고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글을 읽었다. 함께 자고 공부한 형에게는 손발처럼 행동했다.

<괴담유고>에 ‘원조자경(元朝自警, 설날 아침에 스스로 경계하다)’이 하나 전해진다. 12가지 행동강령이다. “어버이의 명을 따른다/ 형과 어른을 공경한다/ 새벽에 일어나 어버이께 문안한다/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어버이 음식을 살핀다/ 추위와 더위에 반드시 어버이 거처를 점검한다/ 매월 초하루 조상의 사당에 참배한다/ 대낮에 눕는 것을 경계한다/ 앉을 때는 다리 뻗고 앉지 않는다/ 말할 때는 반드시 찬찬하고 자세하게 한다/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않는다/ 일할 때 바쁘게 하지 않는다/ 매사에 너무 지나치게 애쓰지 않는다.” 그러나 괴담은 마지막 강령을 어기고 학문에 지나쳐 몸을 해쳤던 듯하다.

만 상자의 재물보다 한 사람의 어진 부인
그는 또 선비가 집안을 다스리는 법도를 ‘거가잡의 (居家雜儀)’로 정리했다. “집안의 흥망이 부인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십중팔구다. 부인을 구할 때는 구차하게 부귀를 바라지 말고 모름지기 예법을 지키고 빈한을 견디는 집안에서 구해야 한다….” 아내를 정하는 기준이다. 괴담은 “만 상자의 재물을 횡재하는 것이 한 사람의 어진 부인을 맞이하는 것만 못하다”고 적었다. 접빈도 정리했다.

“손님을 접대하는 절도는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없는데도 억지로 성대하게 음식을 차릴 필요는 없다. 이것은 계속 잇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성심을 다해 교제하는 것도 아니다….” 정성이 핵심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도 정리했다. “이웃과 지내는 도리는 모나게 이기려고 마음먹어서는 안 된다. 대체로 이웃이 화합하지 않은 것은 이웃이 불선(不善)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신의가 미덥지 못하기 때문이다….”

글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사진 공정식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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