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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틈탄 북베트남 공세, 반전 여론 높여 미군 철수 불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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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호 18면


설 연휴다. 고향 방문이나 성묘 그리고 여행으로 이른바 국내판 민족대이동이 있는 때다. 지금으로부터 꼭 49년 전인 1968년 1월 29일, 남베트남의 주요 도로 역시 설 전날이라 이동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 인파 속에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越共) 전사들도 섞여 있었다. 무신년 설날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해서 베트남에서는 스끼엔텟마우탄(事件節戊申)으로 불리는, 이른바 구정 공세(Tet Offensive)를 펴려고 잠입하는 중이었다.


설 연휴에는 휴전을 하던 것이 당시 베트남의 관례였다. 남베트남 정부는 설을 맞이해 북베트남과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포하고 일부 군인들의 귀향을 허용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이를 틈타 설날 밤부터 남베트남 정부와 미군의 시설물을 상대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구정 공세로 시작된 전투는 3월까지 지속되다가 5~6월 그리고 8~9월에 다시 치러졌다.


구정 공세의 주요 공격 대상 중 하나는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관이었다. 베트콩은 대사관 담장 벽을 로켓포로 뚫고 침입해 대사관에 많은 인명 피해를 입혔다. 이런 장면들이 생생히 보도되면서, 미국 국민은 전쟁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다는 정부의 설명에 의문을 갖고 미군 철수 주장에 힘을 보태게 됐다.

[‘사이공식 처형’ 사진, 반전 분위기 고조]
이런 미국 내 반전(反戰) 분위기는 1968년 2월 1일 AP통신 사진기자 에디 애덤스가 촬영해 세상에 알린 ‘사이공식 처형’이라는 이름의 사진으로 더욱 고조됐다. 애덤스는 사진 속에 남베트남 치안 책임자 응우엔 곡 로안(이하 로안)이 권총으로 베트콩 포로 응우엔 반 렘(이하 렘)을 총살하는 장면을 담았다. 양손이 뒤로 묶인 채 서있는 민간인 복장의 렘 그리고 아무런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군복 차림 로안의 모습은 남베트남군과 미군의 잔혹성을 부각했다. 다음해 애덤스에게 퓰리처상을 안겨다 줄 정도로 사진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함에 따라 미국에 망명한 로안은 미국 내에서도 추방 압력을 받는 등 1998년 사망할 때까지 줄곧 비난에 시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즉결 총살된 렘은 무고한 시민이 아니었다. 렘이 남베트남 경찰 가족의 학살에 직접 가담했는지는 의견이 갈리지만 그가 구정 공세에 참전한 베트콩 대원임은 확인됐다. 렘은 민간인 복장이었기 때문에 전쟁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협약의 보호 대상이 아니었다. 수많은 남베트남 경찰과 가족들이 베트콩에 의해 참살된 직후라서 로안은 렘을 즉결 처형했을 것이다. 훗날 애덤스는 로안을 직접 찾아가 사과했고, 1998년 시사주간지 타임에 기고한 글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추도했다.


“내 사진에서 두 사람이 죽었다. 총살된 사람과 응우엔 장군. 베트콩을 죽인 장군은 내가 카메라로 죽였다. … 사진은 조작 없이도 거짓말을 한다. 절반만 진실일 뿐이다. 사진이 말하지 않은 것은 ‘이미 여러 미국인을 죽인 악당이 그때 그곳의 장군 대신 당신에게 잡혔다면 당신은 어떻게 했을까’이다. … 내 사진은 그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한 번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촬영하지 않았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했었을 것이라고 나에게 말했다. 오랫동안 그와 그의 가족에게 미안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화를 보내면서 ‘미안하고 눈물이 난다’고 전했다.”


언론은 여론을 주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론을 따라가는 경향도 있다. ‘사이공식 처형’ 사진도 당시 반전 분위기에 따라 보도된 것이지 사회적 흐름을 뒤집는 특종 사진은 아니었다. 구정 공세에서 베트콩이 사살한 민간인 사진들 역시 보도됐으나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당시 베트콩의 만행은 미국 대중이 그렇게 듣고 싶은 소식이 아니었다.

[북베트남이 정치· 전략적 승리 거둬]
구정 공세의 결과를 사상자 수로 따지자면,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패배였다. 베트콩 조직은 치열한 전투로 거의 와해되어 이후 북베트남에서 파견된 인사가 운영했다. 미국과 남베트남이 군사적·전술적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전략적 승리는 북베트남에 돌아갔다. 왜냐하면 구정 공세 이후 미국의 반전 여론은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북베트남이 수세에 몰리던 전세는 돌변했고, 결국 미군은 1973년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물론 많은 죽음을 감수하면서 미국을 쫓아내어 통일과 독립을 이룬 베트남은 오늘날 미국을 우방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려고 큰 희생을 치르고 미국과 전쟁했느냐 하는 자기모순을 느낄 정도이다.


북베트남의 정치적 승리는 절박함과 대의명분이라는 두 가지 전략적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절박함이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해 수세적이고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구정 공세의 필요성을 인지했다.


필사즉생(必死卽生)의 태도는 우위에 있을 때보다 궁지에 몰려 있을 때 관찰된다. 궁지에 몰린 약자가 강자에게 도전하기 쉬움은 여러 고전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춘추좌씨전』에서는 곤수유투(困獸猶鬪) 즉 “곤경에 처한 짐승일수록 오히려 싸우려 한다”고 서술하고 있고, 『염철론』에서는 궁서설리(窮鼠齧狸) 즉 “궁지에 몰린 쥐가 살쾡이를 물고, 필부도 천자의 군대를 칠 수 있으며, 신하도 활을 꺾을 수 있는데, 난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이 그렇다(窮鼠齧狸 匹夫奔萬乘 舍人折弓 陳勝吳廣是也)”고 전하고 있다.


실패하더라도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측은 도박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에게 덤비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때로는 무모하게 보이는 행동이 합리적인 선택인 것이다. 이를 부활 가설로 설명하기도 한다. 성공 가능성이 낮아도 성공할 때 얻을 게 매우 크다면 도전하게 된다. 이는 성공 가능성과 성공의 결과로 계산한 기대효용 값이 큰 쪽을 선택한 것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할 것 같았던 상대가 죽기 살기로 덤비면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 그래서 궁서막추(窮鼠莫追), 즉 궁지에 몰린 쥐를 쫓지 말라는 경구가 나온다. 박멸이 목적이 아니라면 상대를 쫓을 때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주고 몰아야 한다.


다음의 전략적 요인은 대의명분이다. 구정 공세 잠입일로부터 710년 전, 즉 지금으로부터 꼭 759년 전인 1258년 1월 29일은 북베트남 지역의 대월(大越, 안남)국이 남베트남 지역 참파국과 함께 몽골 제국을 기습하여 몰아낸 날이다. 베트남은 조공 관계를 맺는 등 온건하게 대응했을 때도 있지만 세 차례(1258년, 1285년, 1287~8년)에 걸친 몽골의 침공을 격퇴한 바 있다. 베트남인에게 구정 공세는 세계 패권국을 격퇴해 독립한다는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동시에 미국의 개입이 부당하고 잘못되었음을 드러내어 미국 내 반전과 철군의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대의명분 부족하면 대부분 실패]


궁지에 몰려 반격을 도모했을 때 대의명분이 부족하면 대부분 실패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44년 12월 패색이 짙어진 독일은 아르덴 지역에서 대규모 공세를 전개했다. 전쟁과 패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히틀러가 군사력을 총동원해서 기습 공세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아르덴 공세(벌지 전투)는 부활 가설의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독일군은 사상자 수가 연합군보다 적어 단기적으론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지나친 출혈로 결국 패전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아르덴 공세가 역전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세계 여론이 독일에 불리하게 돌아섰기 때문이다.


미국은 베트남에 부당하게 개입했다고 비판 받아 결국 패전했지만 명분을 중시할 때가 더 많다. 지금으로부터 꼭 15년 전인 2002년 1월 29일, 조시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의회 국정 연설에서 이라크·이란·북한을 악의 축으로 명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에서 따온 명칭이었다. 8월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제2의 히틀러로 불렀다. 상대를 악마로 묘사함으로써 지지나 동원을 받아 승리할 가능성을 키운 것이다.


후세인은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관한 유엔의 사찰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WMD를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침공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미국으로서는 이라크가 WMD를 보유하고 있으면 더 늦기 전에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또 실제 보유하지 않더라도 후세인이 사찰을 거부했기 때문에 침공할 때 오는 부담이 적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2003년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물론 WMD는 이라크에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미국이 책임질 일은 없었다. 상대를 악마로 만듦으로써 정치적 승리와 군사적 승리를 동시에 거두었던 것이다.


목하 대한민국의 안과 밖은 불안하다. 절체절명의 궁지에 처한 측도 있다. 궁지에 몰린 자는 더 이상 잃을 게 없기 때문에 실패를 무릅쓰고 부활하려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박멸될 수도 있다. 상대를 악마로 묘사하는 것은 상대를 박멸하려는 의도이다. 지난 11일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 내정자가 인준 청문회에서 북한 정권을 ‘적’이나 ‘악당’ 등으로 언급한 것도 그런 예다. 북한을 포함한 누구나 그렇게 규정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악(舊惡)이 제거되더라도 새로운 더 큰 악이 등장할 수도 있다. 만약 함께할 상대라면 굳이 궁지에 몰 필요가 없고, 만약 박멸할 상대라면 박멸에 그치지 않고 더 큰 악이 등장하지 않도록 조처해야 한다.


김재한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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