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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인간적인 삶, 포기할 수 없는 가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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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호 18면


촛불 시위가 한국 정치의 한 전환점을 나타낸다는 관점들이 있다. 최순실 사건과 관련하여,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가 주장되고 탄핵소추안이 발의되고 그것이 헌재의 심의에 부쳐지는 데에 촛불 시위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촛불 시위로 나가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국정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잘못되었다는 것, 국정의 정의(正義)가 손상되었다는 느낌 또는 판단이 분노의 시위를 촉발하는 힘일 것이다. 공분(公憤)이라는 말이 있지만, 여기의 분노는 공적인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데에서 느끼는 분노이다. 그러면서도 그 분노는 개인의 심정에 상처를 입었기에 일어나는 것이기도 한다. 바른 질서는 집단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이지만, 개인의 삶의 테두리를 알 수 있게 하는 데도 필수 요건이다. 삶을 지탱하는 요인의 하나가 이 테두리의 확실성이고 그에 대한 믿음이다. 이번에 이 믿음이 크게 상처를 입은 것이다.

[지도자는 사익 버리고 희생 각오해야]
플라톤의 이상 국가론에서 논의되는 주제의 하나는 정의이다. 정의가 손상될 때, 그것은 강한 분노를 유발한다. 정의는 사회관계의 정의로움을 말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사람의 본성에서 나오는 요청이다. 플라톤은 사람의 영혼이 세 부분-이성·정열·욕망-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정의는, 심리적으로, 이성에도 관계되지만, 정열에도 관계된다. 여기에서 정열이라고 한 것은 희랍어 씨모스(thymos)의 번역이다. 그러나 씨모스는 분노·두려움·증오 또는 자신감·자존심·명예심 등에 들어있는 감정의 에너지이다.


플라톤의 생각에 씨모스는 정의를 지키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심리적 요인이다. 분노는 공화국의 ‘수호자들’, 특히 중요한 병사의 역할을 맡는 수호자들의 성격적 특징이다. 그리하여 정의는 정의를 위한 정신적 격앙에 일치하는 것으로도 말하여진다. 정의보다는 부정의 사안이 많았던 것이 플라톤 시대 아테네의 현실이고 또 한국을 포함하여 많은 나라의 현실이라고 할 때,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분노를 수반하는 정의감은 국가를 넘어서, 개인의 삶 그리고 인간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요구이다.


정의가 손상될 때,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분노를 격발하게 하는 이 정의는 무엇인가? 물론 정의는 정당한 것, 공평한 것을 말한다. 플라톤에는 정의란 강자(强者)의 체제 또는 이익을 위한 타협의 질서라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정의의 인간은, 사적(私的)인 이익을 버리고 희생을 각오하면서 정의를 수호한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플라톤의 정의관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의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가 생각하는 정의의 질서는 현대적인 관점에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플라톤에게 이상적인 정치 질서는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 일의 원활한 수행을 보장하는 사회 전체이다. 여기에서 ‘해야 하는 일’은 반드시 밖으로부터 주어지거나 강요되는 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해야 하는 일이면서, 일을 맡은 사람의 자질에 맞는 일이고 그러니만큼 그것은 자신의 본성을 알고 있다면 스스로 선택하였을 일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일들은 저절로 사회의 필요에 대응한다.


플라톤의 이상적 정치 체제는 몇 개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맨 아래에 있는 것은 생산계급이다. 농민이나 장인이 여기에 속한다. 그 위에 나라를 수호하는 병사들이 있고, 맨 위에는 수호자이며 통치자인 철학적 통치자가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주어진 자질로서의 이성·정열·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훈련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정의란 재능에 맞추어 사회적 분업의 질서를 유지하는 원리이다. 이러한 사회 분업의 질서는 일정한 강제성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이 체제는 스스로의 재능에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강요되는 것은 아니라고 플라톤은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계급적 질서인 것임은 틀림이 없다. 그런데다가 플라톤의 세 계급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노예가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계급 체제도, 적어도 플라톤의 관점에서는 개인이나 계급의 일방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확보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공화국 수호자의 삶의 방식 자체가 사익의 추구를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수호자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다. 그들은 물질이나 금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 돌보아야 할 가족도 없다. 배우자는 스스로 선택한 인간이 아니고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분리되어 공동으로 양육된다. 그들도 공동생활을 한다. 이러한 금욕적 생활은 이미 사사로운 이익이나 목적을 추구하기를 어렵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국가 전체의 안녕과 번영에 집중된다.

[최순실 게이트, 정의에 대한 믿음 흔들어]
여기에서 플라톤의 공화국을 언급하는 것은 물론 그 자체를 해석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의의 질서와 그에 입각한 정치의 투명한 공적 성격을 상기하자는 것이다. 또 상기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 가지의 정의의 질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여 국가의 성원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정치 질서를 말한다. 왕권정치 하에서도 그러한 질서는 가능하다. 플라톤의 계급적 질서는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정의의 질서로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희랍 시대에도 이소노미아(isonomia), 정치적 권한의 동등함이 논하여지기는 하였다. 정의에 대한 열정도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갖는 열정, 즉 이소씨모스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 정의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질서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평등의 조건을 지나치게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의는 어떻게 정의(定義)되든, 함께 사는 질서의 근본 조건이다. 이 질서는 철학적으로 또는 형이상학적인 명증성을 갖는다. 그러면서 그것은 현실적 요청이다. 형이상학적이라고 하면, 그것은 현실을 벗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지만, 인간의 현실 자체가 그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현실의 체제는 그에 대한 믿음, 곧 신념과 신뢰를 필요로 한다. 이 믿음이 집단에 대한 충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을 훼손하는 일은 분노를 폭발하게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최순실 게이트라고 불리는 이번의 사건은 국민의 모두의 집단 의식을 크게 흔드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정치적 입장-보수인가 진보인가, 좌우 어느 쪽인가-을 말하기 전의 정치의 근본에 관계되는 일이다.


그런데 정의의 질서는 다른 한편으로 국민 일반의 인간적인 삶의 확보를 목적으로 한다. 정의의 질서는 적절한 수준에서 번영하고 행복한 삶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도 정의는 삶의 안정을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안정의 주춧돌의 하나는 경제이다. 오늘날의 정치에서, 또는 어느 시대에서보다도, 경제가 공공질서의 바탕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좌우 어느 쪽이든 최소한도의 인간적인 삶의 확보는 국가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명분이다.


복지 정책은 성격이 다르면서도 반드시 진보적인 정부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치에서도 진보와 보수의 들고 남이 있었지만, 부족한대로 사회 안정망은 계속 확대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복지를 정치의 핵심에 두지 않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원형(原形)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미국에 복지정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하여 사회 전체의 삶을 생각하는 사람들-진보적인 입장의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사회 정책이 크게 후퇴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1935년에 제정된 노동관계법에 명시된 작업 조건과 임금, 노사협상에 관한 규정, 1938년의 최저임금제, 시간외 노동에 대한 초과수당지불 제도 그리고 실직보험, 무료식권, 아동양육비, 의료비, 빈곤 가정 주택자금 보조 등 많은 사회 보장 정책들이 폐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빈부 격차 심화로 유럽 중도 정치 후퇴]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방향은 그간의 자유주의 정책들을 역전시키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간의 자유주의 경제는 경제발전에 주력하면서 빈부의 격차를 크게 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에 도움을 준 것은 팽창하는 경제에서 소외되었던 일부 계층의 지지로 가능하였다. 역설은 가장 상층의 부자 계층을 대표하고 그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이 새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비슷한 역설은 오늘날 유럽에서도 볼 수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와 사회적 배려를 버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도 정치 또는 중도 좌파 정치가 크게 후퇴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유럽이다. 그 대신 우파 민족주의가 크게 부상하고 그로 인하여, 어떤 진단에 의하면, 유럽연합(EU)이 해체 직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것은 빈부 격차의 심화와 청년 실업자 증가 그리고 직업 안정성이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에 관계된다. 이 후자를 표현하는 말로 ‘프리캐리어트(precariat)’ 또는 ‘프리캐리아’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용어로 사회의 최하층을 이루는 프롤레타리아와 위태롭다는 뜻의 프리캐리어스(precarious)를 합쳐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이것은 직업 안정성이 없는 사람들을 말한 것이다.


기이한 것은 한국에서도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재작년에 출간된 장하성 교수의 저서에 『왜 분노해야 하는가』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서 분노해야 하는 것은, 국내총생산(GDP)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직업을 얻을 수 없는 청년 실업자들 그리고 비정규직의 사람들이 늘고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시정하는 것이 국가적인 핵심과제라고 장 교수는 말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분노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마 최근에 표현되는 분노의 심리적 에너지도 ‘프리캐리아’에 빠져 들어간 사람들의 분노에 이어진다고 할 수도 있다. 장 교수의 견해로는 한국 사회의 경제 문제는 다른 나라와는 다른 원인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해결도 달라야 한다. 그러면서도 문제들은 여러 면에서 세계 경제의 추세에 평행한다고 할 수 있다.


정치에서 투명성 그리고 공공성을 사라지게 한 소위 최순실 게이트는 어떻게든 조만간에 일단의 해결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는 또 하나의 전기가 될 것이다. 헌법을 비롯하여 법 규정들의 개정이 여러 가지로 논의된다. 핵심에 있는 것은 권력 분산의 과제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의 문제를 법으로만 해결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최근의 사건이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문화 일반,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관행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문제의 다른 주축은 사람의 삶의 안녕과 행복의 조건이고 현실적으로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것은 경제이다. 이것은 보다 현실적 접근이 가능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유럽이나 미국에서 볼 수 있는 시대에 대한 진단들은 이제 한 시대가 가고 대안이 분명치 않는 시대, 이름이 없는 시대, 어떤 학자의 표현으로는 ‘큰 기대의 시대’로부터 ‘공허한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빈곤의 감소, 위생 환경의 향상, 교육 수준의 진보, 평화 의식의 신장 등이 21세기에 남겨진 과거의 유산인 것도 틀림이 없다. 새로운 비전이 분명치 않다고 하여도 사람의 삶의 안녕, 모든 생명과 자연의 보존을 위한 크고 작은 노력이 포기될 수는 없는 일이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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