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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앙숙 독일·프랑스, 과거사 인식 공유하며 밀월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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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호 18면


지금으로부터 꼭 54년 전인 1963년 1월 22일 프랑스 파리의 날씨는 추웠다. 이날 프랑스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에서는 훈훈한 광경이 연출됐다.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콘라트 아데나워 서독 총리가 양국 우호조약에 서명한 후 서로 포옹했다.


이 엘리제조약으로 독일·프랑스 화해가 처음으로 공식화됐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51년 아데나워가 첫 서독 총리로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만 해도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 불신했다. 드골은 대통령직에 오르기 직전 해인 1958년 프랑스 총리 자격으로 아데나워와 첫 정상회담을 했다. 오늘날 용어로 ‘브로맨스’로 불릴 두 정상의 우정이 시작된 것이다. 1962년 7월 8일 두 정상은 프랑스 랭스 대성당의 미사에 함께 참석했고 드골은 이 사실을 성당 바닥에 새겼다. 당시 언론은 두 정상의 서약을 ‘세기의 사랑’ 또는 ‘세기의 결혼’으로 묘사했다. 엘리제조약은 두 정상의 의기투합이 맺은 결실이었다. 양국 정상(頂上)이 양국관계를 정상(正常)화한 것이다.


이후 독일·프랑스 관계는 돈독해졌다. 오늘날 양국 관계를 적대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2003년 엘리제조약 40주년을 기념해서 양국은 공동국적을 인정하고 각료를 교환하기로 합의했으며, 2010년 프랑스 재무장관이 독일 각료회의에 참석했다. 또 양국은 조약 40주년 기념행사로 프랑스 베르사유궁전 극장에서 합동 의원회의를 개최했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도 참석했다. 베르사유궁전은 1871년 독일제국 선포와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강화조약 체결로 독일과 프랑스가 치욕과 설욕을 주고받았던 역사의 현장이다. 또 2013년 조약 50주년을 기념해서는 독일 베를린에서 합동 각료회의와 합동 의원회의를 열었다.

[독일 영웅 비스마르크, 프랑스선 원흉 서술]


독일·프랑스 화해는 적대관계를 바꿔버린 대표적인 사례로 오늘날 언급되고 있다. 지도자의 우정 외에도 적대관계를 화해로 바꾼 전략적 요소가 엘리제조약에 담겨있다. 먼저, 과거사 인식의 공유다. 양국의 과거사 인식은 엘리제조약 이전에 잘 공유되지 못했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나폴레옹 1세와 비스마르크는 자국 교과서에서 영웅으로 평가됐지만 상대국 교과서에서는 원흉으로 서술됐다. 또 나폴레옹 3세의 독일 견제 정책은 독일 교과서에서 독일 통일을 방해한 부당한 간섭이자 위협으로 서술된 반면에, 프랑스 교과서에서는 자국 안전을 확보하려는 당연한 위기 대비책으로 평가됐다. 상대가 시작한 전쟁은 침략전쟁이고 자국이 시작한 전쟁은 정당한 전쟁으로 묘사된 것이다.


엘리제조약 이후 과거사 인식 공유가 적극적으로 추진됐다. 공동 역사교과서 편찬은 그 대표적인 사업이다. 양국 역사교과서 협의회의 ‘1987년 권고안’은 나치에 대한 독일인의 저항 활동을 담았다. 또 프랑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복구시키려는 미국 및 영국의 계획에 반대했으며 자르지역을 독일에서 분리하고 루르지역을 독일로부터 빼앗으려 시도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런 서술은 프랑스가 독일 위협의 재등장을 막으려 했다는 맥락에서였다. 양국 정부가 주도해 2006년에 출간한 첫 공동 역사교과서에서는 각 부 말미에 ‘독일·프랑스의 교차된 시선’이라는 코너를 만들어 양국 간 견해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양국의 차이를 애써 외면하지 않고 교류를 통해 상대 입장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이었다.


독일과 프랑스 모두 참혹한 과거로부터 벗어나서 밝은 미래를 만들고 싶어했다. 엘리제조약에 따라 1965년 독일·프랑스청소년사무소가 설립돼 양국의 수많은 청소년들을 교류시켰다. 50년 동안 약 1000만명이 참가했고 상대국에 약 30만명이 일하고 있다. 양국의 합동 중·고등학교와 연합 대학교도 설립됐다. 화해는 과거를 외면하거나 망각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직시해서 오해한 것은 풀고,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생각은 인정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용서할 것은 용서해야 이뤄지는 것이다.

[국가 간 화해는 국내정치 보완을 전제]


국가 간 화해는 국내정치와 법제도로 보완돼야 지속가능하다. 프랑스는 많은 독일인이 나치의 탄압을 받았고, 나치에 희생된 독일인은 피해자이며, 독일을 짓누른 권력과 이념이 프랑스의 적이라고 천명했다. 통일 전 서독과 통일 후 독일의 정부는 확고한 국내정치적 기반을 갖고 나치의 전쟁범죄를 지금까지도 법률로 단죄하고 있다.


화해의 전략적 배경 하나는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이다.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적대관계는 양국이 각자 유럽 패권을 쟁취하려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에 걸쳐 100년 동안 발생했다. 그래서 앙숙 또는 숙적관계로 불린다. 그런데 숙적관계는 적대관계가 오래되었다는 의미이지, 영원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과 프랑스는 패권을 추진할 수 있는 처지가 더 이상 아니었다. 독일은 패전국이었고, 프랑스는 승전국 지위를 부여받았지만 전쟁 중 독일에 정복당해 심각한 타격을 입은 국가였다. 전후 질서에서 서방 진영의 지분을 높이기 위해 미국과 영국이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를 전승연합국에 포함시켜주었을 뿐이다. 유럽 대륙에서 패권국을 자처하려고 했던 프랑스와 독일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등장으로 패권국 후보에서 멀어졌다.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는 소련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을 견제하려는 측면도 있었다. 특히 엘리제조약 체결은 미국으로부터 독자성을 확보하려는 드골의 의도가 깔려있었다. 조약 초안이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이나 미국과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협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부정적인 기류에 미국이 반발했다. 서독은 조약 문건에 미국과 서독의 기존 관계가 엘리제조약에 의해 침해 받지 않는다는 단서 조항을 추가해서 의회 비준을 받았다. 드골의 프랑스는 대서양 중심의 유럽보다 유럽대륙 중심의 유럽을 원했다. 프랑스는 영국이 1962년과 1967년에 EEC와 유럽공동체(EC)에 각각 가입하려 했을 때 거부한 바 있다. 영국은 1973년이 돼서야 EC에 가입할 수 있었다. 물론 오늘날 영국은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기로 스스로 선택했지만, 지금 영국의 행동은 견제나 몸집 키우기가 아닌, 부담 줄이기로 추진되고 있을 뿐이다.

[독·프랑스 화해, 유럽공동체 진전과 함께해]
제2차 세계대전 직후만 해도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악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이 서독 루르지역의 생산 규제를 해제하려고 하자 프랑스는 처음에 반대했다. 그러다가 1950년 로베르 슈망 프랑스 외무장관이 유럽을 결속하자는 취지에서 초국가적 기구를 통해 석탄과 철강 산업을 공동으로 관리하자고 선언했다. 다음해 독일·이탈리아·베네룩스 3국이 이를 수락해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발족됐다. ECSC는 EC를 거쳐 EU로 진전되었던 것이다. 독일·프랑스 화해는 유럽공동체의 진전과 그 궤를 함께했다. 이처럼 반(反)패권적 지역공동체 설립이 추진될 때 양국의 숙적관계도 잘 해소되는 것이다.


오늘날 동북아시아는 적대적 관계로 점철돼 있다. 적어도 지역 패권을 지향할 수 있는 의지와 국력을 갖춘 국가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화해 진척을 막고 있다. 이미 근대화 이전과 직후에 각각 중국과 일본의 패권적 통합을 경험했고 이는 과거사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갈등의 주요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반패권적 동북아공동체의 필요성이 더욱 체감되는 시점이다. 개방 이전이나 이후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에 예속됐던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화해는 피해자가 주도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점에서 한국이 중국과 일본 간의 이견을 조정하면서 동북아공동체를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과거를 덮어서는 안 된다.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에서도 역사교과서 집필이나 기념일 참석을 공동으로 적극 추진함으로써 과거를 기억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상대가 진정으로 화해하려는 것인지는 그런 공동 사업을 통해 잘 판단할 수 있다.

[동북아 청소년교류 적극 추진해야]
과거사 문제는 피해 당사자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다. 용서나 화해는 피해자가 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정부, 시민단체, 심지어 후손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기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정부의 반성도 있어야 한다. 반면 가해자 측은 후손이나 정부의 적극적 반성 의지가 있어야 화해가 성사된다. 예컨대 식민 지배와 관련 없는 식민 지배자의 후손이 사과해야 하냐고 피해자 측에 강변하는 것은 화해에 도움되지 않는다.


과거사 때문에 현재관계가 나빠지는 만큼이나, 현재관계가 나쁘기 때문에 과거사문제가 심각해지는 경우도 많다. 미래의 나은 관계를 위해 현재에 미리 조처해야 하고, 동시에 나은 미래관계를 만들어 현재문제가 향후 심각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현재관계는 과거뿐 아니라 미래관계에도 영향을 주고 또 받는 것이다. 과거를 정리하는 공동 동북아역사교과서 편찬 그리고 미래세대가 인식을 공유하게 만들 청소년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최근 소녀상 문제로 강경파 아베 신조 내각의 일본 내 지지율은 더 높아졌다. 반(反)나치의 정파가 독일 내 주도 세력이 되도록 고려했듯이 일본 내 반성하는 정파가 힘을 잃지 않도록 한국은 합리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일본인 전체와 싸우는 태도는 효과적이지 못하다.


양국의 우적관계는 다자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할 때가 많다. 함께 협력해야 할 제3국뿐 아니라 함께 견제할 제3국의 유무도 중요하다. 드골은 미국과 소련의 양극체제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모색하던 중에 독일과의 화해를 모색했다. 동북아에서도 전략적 제휴가 시급하다.제휴 파트너의 가장 중요한 선택 기준은 위협 여부다. 프랑스-독일 사례에서도 상대가 자국을 위협하거나 도발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았을 때 화해가 진전되었다. 동북아 국가들은 타국을 위협하는 요인을 스스로 제거해야 자국에 대한 경계 또한 사라진다. 대한민국이 적대관계를 벗어나 화해하거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할 파트너는 대한민국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필요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김재한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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