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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싶은 말 내뱉는 통쾌한 매력 오디션 프로그램 넘어 대중화의 길 찾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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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호 18면


요즘 방송가에선 힙합이 화두다. 최근에는 MBC의 대표적인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이다. ‘위대한 유산’이라는 부제 하에 무한도전 멤버들과 래퍼들이 한 팀을 이뤄 역사인식을 주제로 랩 대결을 펼쳤다.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는 황광희와 손잡고 윤동주를 랩으로 논했고,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비와이는 양세형과 함께 하얼빈역의 안중근을 노래했다. 전파를 탄 6개의 힙합 곡들은 방송 직후 음원사이트를 점령했다. 가요 음원 순위를 매기는 가온차트의 지난주 1위는 광희와 개코의 ‘당신의 밤’이 차지했고 3위는 ‘쏘아’(하하&송민호), 7위는 ‘처럼’(유재석&도끼)이었다.


열풍의 시작은 케이블 채널이었다. 2012년 6월 음악전문방송 엠넷에서 제작한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가 도화선이었다. 애초에 이 프로그램의 성공을 장담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실제로 전파를 타기도 전에 ‘슈퍼스타K’의 아류라는 뭇매가 쏟아졌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작금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슈퍼스타K’는 화려한 과거를 뒤로한 채 시즌 종영 때마다 프로그램의 존폐가 논의되지만, ‘쇼미더머니’는 시즌제를 거듭하면서 상승곡선을 이어가고 있다.


경쟁자들도 재빠르게 움직였다. 고지를 선점한 엠넷은 ‘쇼미더머니’를 발판삼아 여성판 ‘쇼미더머니’인 ‘언프리티 랩스타’를 내놓았다. JTBC는 할머니 연예인과 래퍼를 한 팀으로 묶어 경쟁하는 ‘힙합의 민족’으로 맞대응했다. MBC는 설을 앞두고 파일럿 프로그램 형태로 힙합판 ‘나는 가수다’ 논의를 하고 있다고 한다. 힙합 콘텐트가 방송가의 굳건한 흥행 보증수표인 ‘먹방’을 위협하는 기세다.

[비트 안에서 뛰어노는 랩의 개방성에 열광]


미디어는 왜 힙합에 눈을 돌렸을까. 오디션 프로그램 제작자의 시각에서 고음 경쟁과 소재 고갈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신의 한수’로만 작금의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답변이 궁색하다. 사실 힙합이 국내에 이식된 이래, 20여 년간 가장 열렬하게 호응한 이들은 전통적으로 10대와 20대다. 즉 준비된 예비 수용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미 존재했다는 말이다. 미디어는 10~20대라는 견고한 지지층을 밑천으로 삼아 판을 만들었고, 판에 뛰어든 사람과 판을 지켜보는 사람 모두 물을 만나며 손뼉이 맞았던 것이다.


젊은 층이 힙합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음악적 특성과 맞닿아있다. 가사가 음표에 종속되는 전통적인 방법론을 거부하고, 비트 안에서 최대한 뛰놀게 하는 랩의 개방성이 핵심이다. 동일한 4분 길이의 노래라도 힙합 곡은 갑절의 이야기를 내뱉는다. 가사의 글자 수가 제한되어 함축적일 필요가 적다 보니, 노래가 일상화법과 다르지 않다. 국내 래퍼 스윙스는 ‘500Bombs’라는 곡에서 24분 56초에 달하는 500마디 랩을 선보인 바도 있으니 시간에 쫓겨 할 말을 못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힙합 곡들의 가사가 길다고 하여 전달력이 월등히 높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사의 길이는 기본적인 틀의 문제일 뿐, 정작 귀를 당기게 하는 부분은 넓은 틀 안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일 것이다.


래퍼들은 하고 싶은 말을 자기 입으로 마음껏 한다. 기성 가수 곡들이 작사가의 도움을 받는 반면, 자신의 가사를 남이 써준다는 것은 래퍼로서는 사망선고에 가깝다. 소속사에서 가사에 개입한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그만큼 타자로부터 기인한 자기 검열이 개입할 여지가 적다. 행여나 방송 불가 판정이 난다고 해도 근신은커녕, 오히려 이것을 훈장처럼 느낄 정도다.


최순실 게이트 정국 하에 가요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노래는 두 곡이었다. DJ DOC의 ‘수취인분명’과 산이의 ‘나쁜 X’다. 두 곡 모두 국정농단 사태를 직간접적으로 비판한 힙합 곡들이었다. 메시지의 과감성으로 따지자면 가요계는 힙합과 힙합이 아닌 음악으로 선을 그을 수 있을 지경이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나이, 말하고 싶어도 눌려 있어야하는 나이의 귀들이 본능적으로 힙합에 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굳이 ‘저항정신’이라는 딱지를 거창하게 붙일 것까지도 없다.

[알바 세대에 역할 모델 된 래퍼]
게다가 감성적인 접근으로 젊은 층에 다가가기도 한다. 랩 가사의 주된 클리셰 중 하나는 자수성가다. ‘스웩’이라고 불리는 자기 과시가 단순히 ‘돈자랑’과 ‘허세’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래퍼 겸 프로듀서인 도끼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실력 하나만으로 최고급 외제차를 여러 대 굴리는 모습은 알바 세대들에게 어느 누구의 위인전보다 훨씬 현실적인 덕담으로 다가온다. 가요계에서도 비주류에 속했던 힙합 아티스트들이 홀연 지상파 방송의 무대를 장악하는 광경은 음악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극적이다. ‘존경하는 인물’이 사라진 청년들에게 성공한 래퍼는 그 세대의 역할모델인 셈이다. 그들이 부지불식간에 힙합 프로그램에서 내뱉은 말버릇과 제스처는 바로 다음날 학교 교실에서 유행으로 부상한다. 이쯤되면 10~20대를 흡수할 수 있는 힙합의 동력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쇼미더머니’ 출연진이 방송 직후 다수의 대중이 몰려있는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 목록에 오르는 기현상도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미디어는 영민하게도 힙합의 하위개념 중 하나인 ‘디스’를 끌어내 시청자 눈앞에 들이밀었다. 무례, 결례라는 뜻의 ‘디스리스펙트(Disrespect)’라는 말을 줄인 ‘디스(Diss)’는 힙합계에서만큼은 상대방을 공개적인 랩으로 공격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가요계에서 가사를 통해 상대방을 호명하며 비난하는 행위는 힙합 이외에는 극히 드물다. ‘디스’의 내용은 랩 실력 부재에 대한 조롱, 성취에 기인한 우월감, 심한 경우에는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는다.


‘쇼미더머니’를 비롯한 대부분의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은 디스 대결을 통해 생존과 탈락이 결정되는 구조를 취했다. 주먹만 오가지 않았을 뿐이지 랩 공방을 주고받으며 서로 얼굴을 붉히는 장면은 여과 없이 전파를 탔다. 참가자 입장에서 존경의 대상인 멘토마저 디스의 대상이 된다. 나름대로 심의를 위해 즉흥 랩에 담긴 욕설에 ‘삐 처리’를 하지만, 신경질적인 전자음은 오히려 아드레날린을 배가시킨다. 편을 갈라 무대 위에서 랩 진검승부를 벌이는 모습은 로마 콜로세움의 검투사 대결과 다를 바가 없다. 세상 재미있는 구경이 싸움 구경이라는데, 합법적 형태로 싸움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은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과 UFC가 전부다. 힙합의 극적인 묘미가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만나는 순간이다.

[진정한 ‘힙합 르네상스’가 도래하려면]
문제는 그 이후, 선을 넘어가는 경우다. ‘쇼미더머니’의 경우 랩 대결의 현장에 심판은 없고, 관객 평가단만 존재한다. 현장의 호응이 우선순위다보니, 때론 발언 수위가 위험선을 넘나들기도 한다. 시즌 4에 출전한 송민호는 무대에서 “딸내미 저격,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라는 여성비하 랩을 내뱉는 바람에 구설에 올라 ‘쇼미더머니’ 제작진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처분의 중징계를 받은 바 있다.


무대 위에서만이 아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힙합계의 고질적인 화두는 여성혐오다. 여성비하 단어의 무분별한 남용에서부터, 성공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수단의 하나로 여성을 도구화하는 시각이 도마에 오른다. 국내 힙합계에 문제적 인물로 떠오르고 있는 블랙넛도 모멸감을 불러일으킬만한 노골적인 성적 가사로 여성혐오 논란을 증폭시키고 있는 중이다. “랩 스타로 떠서 매일 밤 여자 아이돌의 속옷을 벗기겠다”는 가사에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기발한 가사로 진검승부를 벌이는 ‘디스’의 원래 미덕은 온데간데없고 망측한 악다구니만 남은 경우다.


힙합의 주된 청취자들이 20여 년간 10~20대에서만 회전문처럼 머무르고 있다는 점은 말초적인 전달법을 뛰어넘어 확장된 주제와 방법론을 고심해야하는 지점에 도달했음에 대한 경고다.


앞에서 열거한 TV 프로그램 덕분에 힙합의 양적 성장은 호오를 떠나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근래의 대중화로 힙합이 제2의 르네상스를 맞게 된 것인가.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전파를 탄 힙합 음원들은 차트를 휩쓸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딱지를 떼고 발표한 음원들의 성적표는 어떤가. 100위권 안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힙합 음악의 내적 완성도가 차트 순위로 대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힙합의 대중화와 ‘무한도전-위대한 유산’의 흥행 사이에는 간극이 분명 존재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제작진 역시 ‘쇼미더머니’를 음악프로그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사람 이야기를 다루는 프로그램, 더 나아가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가깝다고 밝힌다. 힙합을 활용해 미디어가 쾌재를 부르는 사이, 힙합이 내놓을 대답은 무엇인가. 오디션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추지 않아도 대중과 소통할 능력을 가진 신성(新星)을 내놓을 수 있는가. 흥행 잠재력을 확인한 지금, 스스로 진화할 수 있는 내실을 기할 때다.


홍혁의CBS PD·대중음악 평론가hyukeui1@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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