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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산에 뜬 달빛 같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15호 27면


열두 살이 되던 해 처음 자전거를 배웠다. 우리 가족은 시내에 나가 동백꽃처럼 빨간 자전거를 함께 골랐다. 아버지는 배송비용을 아끼겠다며 가족을 버스에 태워 보내고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직접 타고 오기로 했다. 먼저 집에 도착해 아버지를 기다리던 동안 설렘과 두려움이 번갈아 오갔다. 새로 산 자전거를 만날 기대와 비포장도로를 달려오는 아버지가 행여 사고나 당하지 않을까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 시간이 왜 그렇게 길었던지. 엄마에게 몇 번이나 왜 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주위가 어두워져 갈 무렵 열린 대문 사이로 아버지와 빨간 자전거가 보였다. “아이고, 생각보다 멀구나. 힘들어”하며 들어오는 아버지의 땀에 젖은 얼굴이 기억난다. 반가웠다.


다음날부터 자전거 연습이 시작되었다. 사흘 정도 지나자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한참 달리다 뒤를 돌아보니 잡고 있겠다고 했던 아버지가 작게 보였다. 조금 두려웠지만 머리칼을 가르던 바람이 너무 가벼워서 계속 페달을 밟았다. 아버지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나도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첫째 아이는 여섯 살 무렵 자전거를 배웠다. 퇴근 후 어두워진 아파트의 긴 산책로에서 아이의 자전거를 밀어주었다. 허리보다 낮은 자전거의 안장을 잡고 달리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이가 휘청거릴 때마다 핸들을 잡아주고 속도도 맞추어야 했다. 한동안 운동과 절교한 탓에 가쁜 숨이 턱에 닿았다. 사흘이 지나자 아이는 제법 중심을 잡기 시작했다. 나 역시 아버지가 그랬듯이 잡고 있던 손을 슬며시 놓았다. 아이는 예전의 나처럼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앞으로 나아갔다. 10미터, 20미터….


아이는 한 번 힐끗 돌아보다 잠시 휘청거렸으나 고개를 돌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노란 셔츠를 입은 아이의 등이 아빠의 환호를 뒤로하고 점점 작아졌다. 나는 오래전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멀어져 가는 아버지를 본 것과 반대의 자리에 서서 작아져 가는 아이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작아져 가는 사람을 보는 것은 애상을 불러 일으킨다.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아이 역시 자신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아이는 어느덧 자라서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초등학교 사춘기 입구에 서 있다.


방학을 맞아 뒹굴거리는 아이를 보고 한참 쓴소리를 했다. 돌아서니 마음이 불편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다르덴 형제의 영화 ‘자전거 탄 소년’를 보고 싶어졌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보육원에서 살아야 하는 소년 이야기다. 그런 소년을 동네 미장원 여인이 돌봐 준다. 하지만 그녀의 관심에도 외로운 아이는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리게 되고 곤란한 일을 겪는다. 마을 주민에게 쫓기다 높은 나무 위에서 떨어진 소년. 순식간에 벌어진 사고에 모두 숨이 멎는다.


짧은 정적이 지나고 힘겹게 일어난 아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아버지가 사준 자전거를 타고 길모퉁이로 사라진다. 아이는 페달을 밟는다. 아이가 화면 속으로 사라지고 난 후에도 자리를 뜰 수 없다. 영화 내내 짧게 사용되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의 2악장이 흐르기 시작한다. 멀리 사라져 가버리는 아이의 잔상과 베토벤이 이렇게 어울릴 줄이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은 피아노 협주곡의 ‘황제’다. 밝고 명징한 것이 브람스의 협주곡들처럼 거대한 규모로 듣는 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1, 3악장의 활기차고 당당한 연주도 좋지만 내게는 2악장이 얼마나 몰입하게 하느냐가 감상 포인트다. 오래된 연주로는 지휘자 푸르트뱅글러와 피아니스트 에드윈 피셔의 1951년 것이 최고였다. 시대적 분위기도 있었겠지만 마법의 밤에 흘러나오는 느낌의 연주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애정이 가는 연주는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의 것이다. 혹시 클래식 초심자라면 결코 긴 이름에 주눅 들지 말길 바란다. 한 번에 외우기는 힘든 이름이다.


클라우디오 아라우, 크리스티안 짐머만, 한스 리히터 하저의 연주를 더 자주 듣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음반을 좋아하는 이유는 처음 들었던 ‘황제’이고, 피아니스트 미켈란젤리와의 첫 번째 만남이기 때문이다. 은자처럼 섬세하고 예민한 피아니스트였고 다른 대가들에 비해 레퍼토리도 그렇게 넓지 않다. 하지만 이 음반에서 그의 피아노는 눈 덮인 산 중에 떠 있는 달빛처럼 청명하다.


창밖은 아직 1월 중순인데 마음은 이미 봄을 기다리고 있다. 사춘기에 들어선 초등학교 아이와 봄꽃 핀 강변을 자전거로 달릴 생각을 하면 마음이 좀 밝아진다. 하지만 아직 날이 풀리기 전까지는 베토벤으로 조금 더 견뎌야 한다. ●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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