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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개미집에 있었네, 진화론 새 열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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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개미와 공작
헬레나 크로닌 지음
홍승효 지음, 사이언스북스
792쪽, 3만5000원

거의 같은 시기에 진화론을 주창한 영국의 찰스 다윈(1809~1882)과 앨프리드 월리스(1823~1913)는 ‘자연선택’을 핵심으로 내세웠다. 예로 초원에서는 가젤영양처럼 빠른 초식동물이 주로 살아남았다. 사자와 같은 포식동물의 공격을 피하는 데 유리해서다. 이렇게 생존에 유리한 특징을 가진 종만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손에게 대물림할 수 있었다는 것이 자연선택의 핵심이다.

하지만 자연에는 자연선택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수컷 공작의 화려한 깃털이나 사슴의 커다란 뿔이 생존에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큰 뿔 때문에 포식자의 눈에 잘 띄어 먹이가 되거나 덤불 속에 갇혀 빠져나오기 힘든 상황도 왕왕 벌어진다. 그래서 다윈은 1859년 『종의 이론』을 출간한 지 12년 뒤 『인간 유래와 성 선택』이라는 책을 펴내고 이를 보완하려고 했다. 수컷 공작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한 깃털을 발달시킨 이유는 암컷의 눈길을 끌어 짝으로 ‘간택’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다윈은 이를 번식을 위한 선택, 즉 성 선택으로 불렀다. 종 내의 번식 경쟁에서 이긴 개체만 자신의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기 때문에 자연선택과는 다른 성 선택이 이뤄진다는 이론이다.

성 선택과 함께 자연선택론으로는 도무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생물의 이타성이다. 개미사회에선 여왕개미만 알을 낳고 같은 암컷인 일개미들은 후손 증식 없이 일생에 걸쳐 집단을 위해 일만 한다. 이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다윈주의의 틀을 넘어선다.

생존에 방해되는 공작의 화려한 깃털. 다윈주의의 난감한 예외로 꼽혔다. [사진 사이언스북스]

생존에 방해되는 공작의 화려한 깃털. 다윈주의의 난감한 예외로 꼽혔다. [사진 사이언스북스]

결국 성 선택과 이타성에 대한 설명은 진화론의 ‘빠진 이’를 보충해줄 ‘학문적인 임플란트’ 구실을 한다. 하지만 이는 오랫동안 제대로 연구가 이뤄지지 않다가 페미니즘의 대두와 함께 비로소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영국의 철학자로 동물행동학·인간행동학·다윈주의·페미니즘·성선택이론 등을 연구해온 지은이는 이 책에서 진화의 이단적 요소로 지적돼온 성 선택과 이타성이 사실은 생명 진화의 결과임을 논증한다.

지은이는 개미들의 자기희생과 이타주의를 인간의 도덕성과 결부시킨다. 생물의 진화가 단순히 개체의 생존과 종의 번식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화는 생물들이 조화롭게 지구상에서 공존하기 위한 보다 큰 드라마라는 설명이다. 지은이는 이처럼 19세기의 진화론을 현대철학의 대상으로 진화시켰다.

이 책은 현대 학문이 고드름처럼 한 방향으로만 발전하지 않고 거미줄처럼 서로 다른 분야가 얽히고설켜 새로운 타래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학·역사·철학을 하나로 녹여가는 ‘통섭’의 과정이 눈길을 끈다. 1991년 영국에서 처음 출간됐다.

[S BOX] 동료가 풀 뜯을 때 ‘보초’ 서는 과나코 이타심의 비밀

낙타과 동물 과나코는 성질이 온순하다. 집단 생활을 하는데 무리가 풀을 뜯는 동안 그 중에서 가장 튼튼하고 힘센 녀석이 산비탈에 서서 ‘사주경계’를 한다. 위험이 닥쳐오면 즉각 흥분해 ‘꽥꽥’거리며 싸울 태세를 갖춘다. 아라비아노래꼬리치레라는 긴 이름의 조류도 마찬가지로 무리에서 가장 강하고 원기 왕성하며 기민한 녀석이 초병을 자청한다. 동물의 왕국에서 벌어지는 의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생존과 번식을 제1 목표로 행동하도록 유전자에 ‘이기적’으로 프로그램된 생물이 어떻게 이렇게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지은이는 여러 학자들의 분석을 인용해 동물도 자신을 보호하려면 자신이 소속된 무리의 안전부터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다고 풀이한다. 이러한 이타주의는 결국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라는 설명이다. 인간의 많은 행동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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