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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 음악

과정을 빚는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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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정경영 한양대 교수·음악학자

정경영
한양대 교수·음악학자

대학과 대학원에서 6년 동안 같은 공부를 하던, 아니 6년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이 몰려다니던 친구 두 명과 내가 다시 함께 만난 것은 19년 만이었다. 어색한 것도 잠깐, 옛 시절로 돌아가 수다를 떨고, 또 그때처럼 히히덕거렸다. 그중 뮤지컬 기획을 하고 있는 한 친구가 자기가 제작한 작품에 초대를 했다. 그래서 보게 된 작품이 ‘구텐버그’(22일까지 서울 충무아트센터)였다.

2인 뮤지컬 ‘구텐버그’

별 볼일 없는 뮤지컬이었다. 이른바 브로드웨이식 무대를 생각하면 그렇다. 배우는 달랑 두 명, 그리고 악기는 피아노 한 대뿐이었다. 기억나는 노래도 별로 없고 특별히 감동적인 장면도 그리 많지 않았다. 변변한 러브 스토리도 없었다. 그래서 뮤지컬이 종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냐고? 그것도 별것 없었다. 이 뮤지컬이 했던 궁극적 이야기, 마지막 노래는 너무나 간단한, 그래서 말하고 나면 아무 이야기도 아닌, 그런 것이었다. ‘꿈을 잃지 말아요’.

그런데 독특한 것은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이었다. ‘구텐버그’는 뮤지컬을 만들어 가는 두 친구의 이야기다. 이 과정 속에 별의별 이야기들이 다 들어간다. 아니, 이 두 친구는 뮤지컬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인쇄기를 만든 구텐베르크 이야기, 당연히 그에 맞서는 악당 이야기, 당연히 그를 사랑하는 여인 이야기, 심지어는 홀로코스트와 인종차별 이야기까지 집어넣어야 뮤지컬다운 뮤지컬이 된다고 믿는다.

뮤지컬 ‘구텐버그’의 정문성(앞쪽)과 김신의. 배우 두 명만 나오는 독특한 형식이다. [사진 쇼노트]

뮤지컬 ‘구텐버그’의 정문성(앞쪽)과 김신의. 배우 두 명만 나오는 독특한 형식이다. [사진 쇼노트]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꿈을 잃지 말아요’라는 말은 굳이 뮤지컬이라는 방식으로 다시 들을 필요 없는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뻔한 이야기가 뮤지컬이 되는 순간은 바로 그 이야기가 디테일을 가질 때, 굳이 결론과 관계없는 수많은 ‘과정’이 얽힐 때, 시종일관 유쾌하게 1인 다역을 하는 두 배우의 분주함이 드러날 때, 소극장 무대이지만 브로드웨이식의 대형 무대를 상상하게 만드는 다양한 장치들이 재치 있게 녹아들 때, 바로 그때다.

음악도 그렇다. 음악의 결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그냥 ‘도’다. 웬만한 음악은 모두 ‘도’로 끝나니까. 그러니 음악에서 우리는 결론을 듣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듣는다. 그것이 음악을 듣는 방식이다.

6년 내내 같은 공부를 하던 나와 두 친구들의 이야기도 막상 말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두 음악학을 공부했지만 어쩌다 보니 한 명은 교수가, 한 명은 뮤지컬 기획자가, 다른 한 명은 셰프가 되었을 뿐이다. 그뿐이다. 뭐 원래 인생은 그런 거니까 신기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과정은, 때로 눈물 나게 웃음 나고, 때론 웃음 끝에 먹먹하다.

‘구텐버그’는 그래서 그 자체로 차라리 음악을 닮았다. 음악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 과정을 정성스레 빚는 이야기다. 과정을 무시하고 목적만을 향해 달려가다가 갑자기 피폐해져 버린 지금을 맞게 된 우리가 한번쯤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한, 유쾌하지만 먹먹한 이야기다.

정경영 한양대 교수·음악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