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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40년 세월 건너온 추억의 만화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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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사진= 김상선 기자]

좁다란 만화방, 기다란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눈 빠져라 한나절 … 금세 어둑어둑 "이눔아 ! 숙제 않고 뭐하냐" 아이쿠, 호랑이 아버지 오셨네 내남없이 궁핍했던 1960년대 그곳 - 아 글쎄 '꿈의 곳간'이었지 뭡니까

2006년 1월, 두툼한 다섯 권의 분량으로 박기정(사진(上))의 '도전자'(바다출판사)가 40년의 세월을 건너 우리 곁에 다가왔다. 부천만화정보센터의 고전 복간 사업으로 출간된 이번 만화는 기존 복간 작품에 비해 가장 완벽한 모습을 갖췄다. 전작들은 주로 당대의 인기나 명성보다는 유명 작가들의 작품 중 복간이 가능한 만화들을 출간하거나, 아니면 전체를 복간하지 못하고 일부분만을 복간하는 데 그쳤었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도전자'는 작가가 보관하고 있던 보관본을 기초로, 빠진 부분은 만화수집가 김응수씨가 2권을 보태 총 3부 45권을 완벽하게 복간했다. 당대 최고의 인기작을 불과 10쪽만 빠진 채로 복간에 성공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도전자'의 히어로 백훈이 마음에 진 응어리를 권투로 풀어내며 일본이라는 낯선 타지에서 살아남았던 것처럼, 박기정의 만화 '도전자'도 그렇게 살아남아 세월을 거슬러 우리에게 다가온 것 같다.

'도전자'의 주인공 백훈. 따뜻한 심성을 소유했지만 상처난 마음으로 인해 늘 그늘진 얼굴로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슬픈 카리스마의 주인공이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히로인 훈이는 70년대에는 그늘진 얼굴의 독고탁으로, 80년대에는 꾹 깨문 입술의 오혜성으로 환생했다.

무려 40년 전 번안만화가 판치던 시절, 시대의 아픔을 내면에 품은 주인공을 탄생시킨 주역은 우리에게 시사만화가로 더 익숙한 박기정이다. 40년 만에 '도전자' 전작을 복간한 소감은 의외로 담담하다.

"고민을 많이 했어요. 40년 전 만화가 아닌가? 미숙하고 어색한 부분도 너무 많고. 몇 년 전 한 출판사에서 복간을 제의할 때 원고를 다시 그려야 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사라는 생각에 그냥 출판하게 되었죠. 그래도 부끄럽습니다."

한국만화가협회 초대 회장으로 수많은 만화가의 존경을 받는 대가의 고백이 솔직하다. 작가는 부끄럽다고 말하지만 기실 이 만화를 보면 40년의 시차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최근 작품들과 비교해 작화의 세련미는 떨어지지만 탄탄한 데생과 연출, 그리고 무엇보다 독자를 몰입하게 하는 이야기는 최고 수준이다. 역시 60년대 한국만화 부흥기를 열어간 작품답다.

60년대는 만화방을 통해 한국 만화가 발전한 시기였다. 50년대 후반 등장한 만화가게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만화가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구조가 정착되었다. 만화에 대한 수요가 늘자 만화를 공급하기 위한 전문 출판사들이 설립되었고, 작가도 늘어났다. 그러나 많은 만화가 일본의 이야기나 소설 등을 각색해 제작되었다. 박기정은 일간신문에 캐리커처와 만평을 그리다가 이야기만화로 방향을 전환했다.

"당시 신문사 월급이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만화를 그리면 수입이 훨씬 좋았죠. 많은 만화들이 소설이나 일본 만화의 이야기를 베껴 먹던 시절이었는데, 저는 우리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죠."

소위 세계명작소설을 극화하던 당시 만화가게 만화에 박기정 만화가 준 충격은 대단했다. 박기정은 다양한 장르로 이야기의 폭을 넓혀나갔다. 순정만화에서 만주를 배경으로 한 독립군 만화, 야구만화.축구만화.레슬링만화에 이르는 각종 스포츠만화까지. 무엇보다 당시 독자들이 박기정 만화에 환호한 것은 이야기의 복선과 인물들의 갈등구조였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물론 고등학생과 청년들도 박기정 만화에 빠져들었다.

"만화에는 이야기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요즘 만화들을 보면 그림은 참 잘 그리지만 이야기가 없고, 감동이 없어요."

한국 만화의 대선배 박기정의 충고에 많은 작가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번 '도전자'의 출간을 계기로 한국 만화가 전통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자산을 축적하며,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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