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정책의 딜레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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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노사분규의 확산, 장기화로 요즘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이나 가릴 것 없이 자금난 때문에 아우성이다.
수십억, 수백억원의 긴급자금 지원을 요청하는가 하면 수출 중단으로 인한 무역금융의 상환유에를 해달라는 SOS가 쇄도하고 있는 판이다.
그대로 내버려뒀다간 연쇄도산으로 이어져 자칫 신용공황이 일어날 우려가 높다.
특히 그동안 벌어놓은 돈이 그리 많지않은 중소기업의 경우 계속된 휴업에 이미 지탱할수 있는 한계를 지난 기업도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한은이나 정부의 입장은 중소기업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겠다는 생각이나 사실상 엄두가 안나는 상황이다.
기업들의 어려운 사정은 알고 있지만 시중에 풀린 돈이 너무 많아 자금 지원을 할 경우 올해 통화관리목표(총통화기준 18%증가)도 불가능할뿐더러 경제의 안정기조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안할수 없는 것이 한은의 입장이다.
증시에서는 고객예탁금 및 환매채 잔액등 1조8천억원 이상의 부동자금이 떠돌고 있고 사실상 일부 토지투기조짐마저 일고 있는게 사실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시중엔 넘치는 돈이 있는데 그것이 꼭 필요한 곳에 골고루 가있지 않고 증시주변 등에 부동자금화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코노미스트들 중에는 꼭 총통화증가율 억제목표 18%선을 지킬 필요가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부동산 투기도 염려할 상태가 아니고 국민들이 금융자산을 선호하기 때문에 대만처럼 돈을 조금 더 풀어도 물가에 영향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재무부나 한은측은「18%」선을 인플레에 대한 심리적 마지노선이라는 강박관념에서 고수하려하고 있다.
앞으로 큰 선거를 치를 것까지 생각하면 지금 18%선을 깰 경우 안정기조를 유지해 나가기가 어렵다는 주장엔 충분히 귀를 기울일만 하다. 인플레심리 때문이다.
통화정책의 이같은 딜레마를 대하고 다시한번 제기되는 것이 한은의 중립성·독립성이다.
중앙은행이 독립되어 있다면 국가경제를 생각하는 독자적 판단에서 정책을 선택할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18%선 고수가 불변임을 재확인했지만「도와줄수도, 안도와줄수도 없는 엉거주춤한 상태」속에서 한은자금담당자들만 유달리 속을 태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석구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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