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공적(公的) 영역의 확대를 경계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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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주 신년 연설에서 늘어나는 재정수요를 뒷받침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노 대통령은 그 해결책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정부와 여당에서는 본격적으로 증세(增稅)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섰고, 이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증세 여부에 앞서 더 시급하게 논의해야 할 대목은 재정 확대가 과연 필요한 것인가다. 노 대통령은 재정 확대를 전제로 재원 마련 방법을 언급했지만 그 전제의 타당성부터 먼저 따져보자는 얘기다.

노 대통령은 "양극화 해소를 위한 일자리 대책, 사회 안전망 구축, 저출산.고령화 대책, 미래대책을 제대로 해 나가기 위해선 많은 재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그 일을 온통 정부가 재정자금을 퍼부어 해야 한다는 결론은 위험하다. 일자리는 기업이 고용을 늘리고, 자영업이 번창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왜 일자리를 정부가 직접 만들겠다고 나서는가. 저출산.고령화 대책도 물론 중요하지만 재정만으로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민간경제가 활발하게 돌아가 기업의 사내 복지지출 여력이 늘고 근로자 개개인의 취업기회나 소득이 늘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많다. 미래에 대한 준비 역시 정부가 다 떠맡기보다 개인과 기업이 스스로 대비하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회 안전망 구축은 어쩔 수 없이 정부가 상당 부분 떠안아야겠지만 그 대상은 극빈층과 사회적 최약자층에 국한돼야 한다. 정부가 돈을 대 저소득층 전체의 소득을 올리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정부의 역할은 자활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중산층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집중돼야 한다.

노 대통령의 정책적 지향점은 정부가 국민생활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는, 이른바 '큰 정부'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작은 정부를 공약하지 않는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큰 정부'론은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다. 우리 국민은 '큰 정부'에 합의한 바 없으며 이에 대한 논의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큰 정부'는 국가 자원배분의 큰 몫을 정부가 행사하겠다는 것이고, 그 재원을 충당하는 데 부담을 져야 하는 계층과 혜택을 보는 계층의 이해가 엇갈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큰 정부'론에는 계층 간 갈등과 대립을 부추길 위험이 숨겨져 있다. 이것이 선거의 계절을 맞아 정치적 이슈로 부각되고 특정 정파의 정치구호로 동원됐을 때 빚어질 사회의 분열상은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큰 정부'를 기정사실화해 여론몰이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사전에 차분한 논의를 거쳐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이 정부는 공무원 증원이나 위원회의 남발에서부터 복지.주택.기업 부문 등 주요 정책의 곳곳에서 '큰 정부', 즉 공적 영역의 확대를 꾀하고 있다. 악화된 경제상황의 원인이 시장의 실패에 있다고 재단하고 공적 영역의 확대를 통해 시정하겠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누이 지적했듯 양극화 또는 중산층 붕괴로 대변되는 현 상황은 오히려 시장의 힘에 대한 현 정권의 불신에서 초래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판단 오류에 대한 반성보다 오히려 정부의 힘을 더 키워 민간 영역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겠다고 나서는 발상은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재정규모와 조세부담률이 선진국에 비해 훨씬 작다는 점을 들어 세금 인상의 가능성을 시사한 부분은 사실확인 자체에도 잘못이 있다. 지방정부와 공기업 등 공공부문 전체를 합친 정부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으며, 조세부담률도 우리나라 소득수준과 비슷한 시기의 선진국과 비교하면 비슷하거나 오히려 높다. 선진국에 없는 각종 준조세 성격의 부담금도 감안했어야 했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중산층 복원을 위한 일자리 창출은 민간 부문의 활성화를 통해 가능한 것이지 증세를 통한 공적 영역 확대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