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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지혜 유용하게 활용할 사회의 지혜 모을 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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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 22면


워싱턴 어빙(Washington Irving·1783~ 1859)은 미국 최초의 소설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주로 미국의 독립을 전후 한 사회상을 작품으로 그려냈다. 어빙은 18세기 뉴욕과 허드슨강 주변의 네덜란드계 정착촌들에서 구전되던 전설과 민담을 토대로 상상력과 유머감각을 첨가해 흥미진진한 단편소설집 『스케치 북(The Sketch Book of Geoffrey Crayon, Gent.)』을 1819년에 펴냈는데 『립 반 윙클(Rip Van Winkle)』은 그 책의 첫 번째 이야기이다. 미국인들에게 어릴 적부터 친숙한 『립 반 윙클』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미국이 영국 식민지로부터 독립되기 얼마 전 뉴욕(당시 이름은 뉴암스테르담) 북쪽 허드슨강 유역의 캣츠킬산맥에 한 네덜란드인 정착촌이 있었다. 그곳에 ‘립 반 윙클’이라는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게으르고 돈 버는 실력이 없어 늘 부인으로부터 바가지를 긁히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마음씨 착한 그는 마을의 부인들과 어린이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다. 이웃을 돕는 일이라면 기꺼이 팔을 걷고 나섰으며 어린이들에게 연날리기와 구슬치기를 가르쳐주고 장난감을 만들어 주었으며 인디언과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해주곤 했기 때문이다.

마음 착해 마을 부인·어린이에게 인기
어느 날 립은 아내의 심한 잔소리를 듣게 되자 참을 수가 없어 애견 울프와 함께 엽총을 메고 집을 나섰다. 사냥이라고 해도 그는 뚜렷한 목표 없이 캣츠킬산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어느 깊은 협곡을 지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립 반 윙클” 하고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소리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소리의 주인공은 옛 네덜란드 선원 복장을 한 한 노인이었고 그는 등에 나무 술통을 지고 있었다. 그는 립에게 술통을 산 위로 좀 날라 달라고 부탁했고 립은 기꺼이 그의 부탁에 응했다.


산 위에 올라가서 원형극장 같은 평평한 곳에 이르자 네덜란드 옷을 입은 다른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술을 마시면서 ‘나인핀 볼링’을 하고 있었다. 볼링공이 구를 때마다 온 산에 천둥 같은 소리가 메아리쳤다. 립이 등장하자 그들은 동작을 멈추고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는데 표정들이 기괴했다. 립이 무서워하자 동행했던 노인은 술시중을 들 것을 지시하여 그는 다니면서 그들에게 술을 따랐다. 시간이 지나 조금씩 두려움이 사라지자 립 자신도 그 술을 살짝 먹어 보았다. 그 맛은 네덜란드 옛날 술맛과 비슷하였다. 애주가인 립은 거듭 술을 들이키게 되어 정신이 몽롱해졌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하게 되자 그 자리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난 립은 주위를 둘러보니 그 네덜란드인들은 간 곳이 없고 무성한 풀뿐이었다. 엽총을 찾으니 기름이 쳐지고 번쩍거리던 자신의 엽총 대신에 녹투성이에 개머리판은 벌레 먹고 방아쇠가 떨어져 나간 아주 낡은 총만 있었다. 휘파람으로 울프를 불러보았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자신의 몰골을 살피니 흰 턱수염이 길게 자라있었다. 개는 사라지고 총은 망가진 상황에서 늦은 귀가에 대한 아내의 잔소리가 걱정이 되어 그는 집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을에 도착하니 매우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입구 여관 간판에 영국 왕 조지 3세의 초상화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군복을 입은, ‘워싱턴 장군’이라는 낯선 인물 그림이 있었다. 마을은 예전처럼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립이 사냥 나간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세월이 흐른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신원미상의 그를 붙들고 심문하기 시작했고 왕당파·첩자·도망자 등으로 오해를 받아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립은 자신의 친구 이름들을 하나씩 대보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독립전쟁에 나가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동의 와중에 한 젊은 여인이 아기를 안고 나타났다. 립은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딸 주디스였다. 딸 덕분에 그는 20년 전에 살았던 주민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립은 비로소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을의 원로들은 립에게 일어난 신비한 사건의 원인으로 아마도 그가 17세기 초에 허드슨강을 발견하고 캣츠킬산에 오른 탐험가 헨리 허드슨 일행의 유령을 만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딸 주디스만 늙어버린 립 알아봐
주디스는 그에게 가족들의 안부를 알려주었다. 아내는 립이 실종된 얼마 후 병으로 죽었으며, 아버지를 쏙 빼닮은 아들 립 반 윙클 주니어는 아빠를 닮아 직업 없이 빈둥거리면서 살고 있었다. 딸의 호의로 그녀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 립은 예전처럼 별 수입은 없지만 활기차게 마을을 돌아다니며 각 가정의 잡일을 처리해 주고 동네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자신의 일’을 다시 시작했고 금세 부인들과 어린이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바가지 긁는 아내의 속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마을의 공처가들은 그를 부러워하며 ‘나도 립처럼 그 술을 한잔 마시고 잠 들어 아내로부터 해방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조심스레 말하기 시작했다.


『립 반 윙클』의 군상들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젊은 사람들 시각에서 20년 이상 시대에 뒤졌으며, 옛날이야기를 자주 늘어놓고,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을 못하고 사는 고령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절반은 중간 소득의 50% 이하로 사는 빈곤층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노인 빈곤율이 1위이며 노인 자살률도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고령화와 빈곤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은퇴 후 뚜렷한 소득이 없고, 연금도 없는 노인들이 전체의 60%에 달한다. 일자리가 있다고 해도 저임금 비정규직의 서비스 분야 ‘허드렛일’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의학의 발달로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노인들의 정신적, 신체적 능력이 향상되어 이들의 숫자는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65세 이상의 인구 증가속도가 4.1%). 우리나라 평균 기대수명이 남성 84.1세, 여성 87.2세인데 대부분은 중년인 50대에 은퇴를 하고 기나긴 노년을 보내야 한다. 이들에게 최소한 인간답게 노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인구의 20%에 육박하는 고령자들이 불행해지는 사회현상은 국민 통합에 있어서도 문제이며 국가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노인고용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체는 기업이다. 독일과 일본의 경우 기업은 재고용 제도를 통해 퇴직자들을 임시직으로 재고용하는 경우가 많다. 재고용된 퇴직자들 일부는 고객서비스 부서에 근무하면서 고객들의 기업 방문 시 기업소개 등 가이드 역할을 한다든지, 또는 기술자격을 보유한 퇴직자들은 건설 또는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에 자문역할을 한다든지 하는 형태로 고용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재고용제도는 고령 근로자의 업무지식과 기술 그리고 경험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과 기업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정년이 60세로 연장되면서 정년연장 또는 재고용형 임금피크제가 도입이 되어 현역 때보다 감액된 임금을 지급받으면서 퇴직 후에도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렇지만 아직은 일부 대기업에서만 실시되고 있는 형편이다.


최근 고령화의 비율이 증가함에 따라 시장의 소비패턴이 변화하고 있다. 예를 들면 노년층을 위한 홈오토메이션이 붐을 이루고 있으며, 독거노인들을 위한 로봇이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 노인들의 취향에 맞춘 상품들을 판매하는 노인 전문 매장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또한 노인 전용 PC방도 인기를 끌고 있으며 노인 전문 의료시스템이 강화된 실버 전문 병원이 늘고 있다. 이러한 소비패턴 변화는 노인의 고용을 증가시킬 수 있다. 노인 전문 매장이나 의료시설 그리고 PC방 등에 노인들을 종업원으로 배치하면 이들의 경험을 살려 고령 고객들의 니즈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실버산업의 경쟁력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기업이 고령 근로자의 고용을 늘리는 선순환이 가능해진다.

연금 소득 없는 20년 이상 노후는 재앙
흔히 ‘건강 100세’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근로소득이 거의 없고 연금혜택도 없는 상태로 노인들이 퇴직 후 20년 이상 살아간다는 것은 재앙이 될 수 있다. 이제 『립 반 윙클』에 등장하는 ‘시간 여행자’ 립의 경험을 통해 우리나라 노인 고용문제 해결에 대한 힌트를 얻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는 20년 만에 돌아온 아버지를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집에 모신 딸 주디스의 배려심이 립 노인을 불행에서 건진 단초가 되었다. 어린 시절에 실종된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해준 것이 많지 않았겠지만 딸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다시 돌아온 립은 예전처럼 마을을 다니면서 도움이 필요한 마을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고, 아이들을 위해 장난감을 만들어 주며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공동체에 기여하는 ‘의미 있는 일’을 수행하였다. 이것은 제러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에서 제시된 ‘제3섹터 일’이며 기술혁신으로 인해 일자리가 위협을 받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지속가능한 일자리가 될 수 있다. 은퇴자들이 자신의 전문성과 능력을 살려 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립의 자발적 노동은 마을 공동체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모두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립 반 윙클』들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냈으면 한다. 누구나 언젠가는 노인이 될 수 있다. 오랜 세월 삶의 현장에서 처절하게 살아온 우리의 어르신들이 『립 반 윙클』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들의 경험과 삶의 무게를 존중하고 시간을 초월한 사랑을 보일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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