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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암송 들볶이는 1월은 또다른 ‘고난의 행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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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 18면


북한은 1월이 되면 김정은 신년사로 몸살을 앓는다. 모든 부문에서 신년사 학습을 필수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노동신문은 이를 ‘신년사 학습 열풍’이라고 표현했다. 예를 들어 노동신문은 지난 5일 함경남도 함흥시 당위원회가 신년사 학습을 올해 사상사업의 첫 공정으로 삼고 ‘신년사 학습 열풍’을 세차게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외에 평안남도 당위원회, 원산시 인민위원회 등도 마찬가지라고 선전했다. 강계뜨락또르연합기업소에서 근무한 탈북민 김철광씨는 “신정 연휴(1~3일)를 쉬고 난 뒤 출근하는 4일부터 신년사 학습에 매달려 보통 3월까지 신년사를 손에 들고 있다”고 말했다.


신년사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교시로써 1년 동안의 분야별 정책추진 과제를 담고 있다. 모든 당위원회, 행정기관, 기업소, 협동농장은 신년사를 토대로 사업계획을 수립한다. 신년사가 발표되는 1월 1일 낮 12시 30분 (평양시간 12시) 전 주민들은 동시에 의무적으로 라디오와 TV 중계방송을 시청한다. 그리고 각 시·도 및 단체, 공장, 기업소별로 신년사 관철 결의모임과 궐기대회를 거의 한 달 동안 진행한다.


평양시는 지난 5일 김일성광장에서 군중대회를 열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박봉주 총리, 최용해·김기남·최태복·오수용·곽범기 등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이 대거 참석했다. 이는 신년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날 보고자로 나선 김수길 평양시 당위원회 위원장은 “신년사를 삶과 투쟁의 좌우명으로 삼고 뜻깊은 올해를 위대한 승리의 해로 빛내자”라고 강조했다.

양력설로 휴일인 1일엔 대충 들어
신년사를 접하는 북한 주민들의 마음은 편치 않다. 신년사가 발표되는 1일에는 집에서 김정은의 연설을 대충 듣다가 가족·친척들과 윷놀이나 주패(카드)를 한다. 신년사를 대충 듣는 이유에 대해 탈북민 김씨는 “의무적으로 TV 시청을 하지만 어차피 출근하면 지겹도록 신년사를 공부하고 외워야 하기 때문에 명절만큼은 집에서 편히 쉰다”고 말했다.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황해제철연합기업소 등 큰 기업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1일 출근해 한자리에 모여 신년사를 TV로 시청한다. 그리고 당위원회, 내각 등 정부기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출근해 신년사 학습을 위한 준비를 한다.


신년사 교육은 각 당위원회 선전선동부가 주관한다. 노동신문은 지난 4일 평안남도 당위원회의 경우 선전선동부가 신년사의 기본사상과 내용을 보여주는 체계도 3만부와 신년사 학습자료 5만부를 만들어 도 안의 당조직들에 배포했다고 밝혔다. 신년사 학습은 우선 원문학습에서 시작, 녹화방송과 노동신문을 보거나 체계도·학습자료 등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진행한다. 그리고 학습한 것을 놓고 연구발표모임 등을 통해 신년사에서 부문별로 제시한 과업을 토론한다. 탈북민 김씨는 “신년사 학습을 자기 과제와 결부해야 할 뿐 아니라 열성당원이나 사업장 간부들은 신년사를 통달할 정도로 외워야 하기 때문에 1월은 개인적인 ‘고난의 행군’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올해 신년사는 1만100여자 정도다. 간부가 아닌 일반 직장인들은 해당 부문만 외워도 괜찮다. 예를 들면 경제 부처는 경제부문, 대남 부서는 남북 관계, 공장·기업소는 산업부문 등에 관련된 내용 정도를 암송한다.

  ‘신년사 통달 경연대회’ 열기도
북한은 주민들의 신년사 학습을 독려하기 위해 ‘당근’을 제시하고 있다. 북한의 각 대학이나 공장·기업소는 설날이나 김정일 생일(2월 16일), 김일성 생일(4월 15일)을 맞아 신년사 전문을 통째로 암송하는 ‘신년사 통달 경연대회’를 연다. 대학은 암송대회 수상자들에게 표창장과 함께 관련 과목에 최고 학점을 수여한다. 직장은 대규모 축하공연의 VIP석 초대권, 평양 등 대도시 탐방 등을 선물한다. VIP석은 수상자가 시·도 당위원회 위원장 등 간부들과 나란히 앉을 수 있기 때문에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또한 신년사 통달 경연대회가 몇 달에 걸쳐 진행되기 때문에 경연대회 기간에 대학·직장에서 빠질 수 있다. 단위 직장에서 우승하면 군·시·도 경연 대회에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암송에 자신있는 사람은 도전해 볼 만하다.


그리고 이동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경연대회에 참석하게 되면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일이나 공부도 하지 않고 바깥 바람도 쐬고 일석이조(一石二鳥)다. 함경남도 흥남제련소에서 근무한 탈북민 이소연씨는 “만경대·주체탑 등 평양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이를 악물고 외우기도 했다”며 웃었다. 이씨는 “경연 대회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스터디 그룹인 ‘통달 모임’을 만들어 서로 외운 내용을 수정해 주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최근 들어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문자방(메시지를 주고받는 채팅방)을 통해 신년사의 중심내용과 올해 주민들이 해야 할 과제들을 공유하기도 한다. 전국의 모든 당원들은 다가오는 설날(1월 28일)에 올해 신년사를 읽고 세포(말단 기층조직)마다 부가되는 문답식 경연에 참여해야 한다.


이런 특혜가 있는 반면 ‘채찍’도 있다. 신년사 암송에 게으름을 피울 경우 승진이나 노동당 가입 등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북한 주민들은 매주 토요일 열리는 생활총화에서 암송 상태를 확인받는다. 생활총화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자아비판과 동료의 과오를 지적하는 상호비판을 하는 정치행사다. 그 자리에서 생활총화를 주재하는 세포비서가 개인별 암송 상태를 기록한다. 세포비서는 당의 가장 말단 간부로 당원들의 조직생활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세포비서의 평가가 승진과 노동당 가입 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한 암송 상태가 불량한 사람은 퇴근을 제때에 못한다. 벌칙으로 1시간 정도 남아서 암송하고 검사를 받은 뒤 퇴근해야 한다. ‘원수님(김정은)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함께 받는다.

암송 상태 불량하면 퇴근 제때 못해
노동신문은 신년사 전문을 통달한 사람들이 벌써 나왔고 앞으로 더 나올 것이라고 연일 선전하면서 신년사 학습을 부추기고 있다. 함경북도 청진정제소금공장에 근무했던 탈북민 강금철씨는 “북한 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신년사 내용이나 학습이 아니라 1월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1월이 지나면 덜 들볶인다고 한다.


올해 김정은의 신년사 가운데 전문을 암송하려는 북한 주민들에게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다. 김정은이 신년사 끝부분에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해를 보냈다”고 술회했다. 이 대목은 오류가 없는 존재로 규정된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수령이 직접 자신의 오류를 인정한 것이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북한 사람들이 했던 생활총화를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 앞에서 한 셈이다. 신년사 통달 경연대회를 준비하는 북한 주민들이 이 대목을 어떻게 할지 궁금해진다.


김정은의 이번 ‘자아비판’을 놓고 한국에서도 그 의도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국책연구기관인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2017년 김정은 신년사 특징과 전망’에서 김정은이 이례적인 자아비판을 통해 대대적인 숙청과 물갈이, 즉 ‘정풍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근거로 김정은이 지난달 25일 평양체육관에서 폐막한 제1차 전당초급당위원장대회에서 “전당적으로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 행위를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한 대책을 강하게 세워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것을 제시했다. 김정은이 그동안의 실정에 대한 책임을 당과 내각의 관료들에게 떠넘기기 위한 사전 포석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분석했다. 김정은이 먼저 자책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간부들의 ‘책임성 자아비판’을 유도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또한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이 TV로 보는 앞에서 머리를 숙인 것은 최고지도자로서의 경험 부족이라는 지적도 있다. 엄현숙 서울통일교육센터 전임강사는 “나이가 어린티가 아직 몸에 배어 있으며 머리를 숙이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평가했다.

김정은 자아비판 놓고 해석 분분
이와 반대로 국정운영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평가도 있다. 탈북민 인터넷신문인 뉴포커스를 운영하는 장진성 대표는 “북한식으로 자신감을 지극히 겸손한 태도를 보여준 통치 행위”라며 “한국식 어법과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스스로 ‘애민 지도자상’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이렇게 해석이 나눠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탈북민들은 북한 주민들이 그대로 암송해 발표할 것으로 전망했다. 장 대표는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의 자아비판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신년사가 여러 관계기관의 검증을 거쳐 완성된 김정은의 교시로서 절대화 돼 있는 만큼 그대로 암송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탈북민 강씨는 “오히려 마음속으로 김정은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자아비판’을 더 부각시킬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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