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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상상한다 어떤 리스트의 지배도 없는 세계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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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 18면


정치권력이 개인의 사상이나 상상력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 권력은 신체를 지배하고 공포를 주입할 수 있지만, 생각을 완벽하게 지배하지 못한다. 타자의 내면은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하다. 이 정권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놀라운 것 중의 하나는 배제하는 기준의 허술함과 저급함이다. 이를테면 ‘세월호’와 관련된 선언이나 저작물에 이름이 올라있다면 리스트에 포함시키는 식이다. 이 ‘무지’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근본적인 몰이해이며, ‘문화융성’이라는 공허한 국가주의적 슬로건이 어떻게 문화말살을 의미하는지를 드러낸다. 이런 ‘무지’는 그 자체가 폭력과 모욕의 기원이다. 저 허술한 블랙리스트는 역설적으로 리스트에 오른 예술가들에게는 이상한 자부심과 안도감을 선사하고, 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예술가들에게는 기습적인 모욕감을 준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전도와 시대착오, 이 기이한 코미디는 어딘가 낯이 익다.

1980년 신군부 잡지 폐지 때의 무지 반복
1980년 신군부가 국가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들이 언론사의 통폐합보다 먼저 한 일은 172개의 정기간행물 등록을 취소하는 것이었다. 신군부는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저속, 외설적이거나 사회범죄, 퇴폐적 내용 특히 청소년의 건전한 정서에 해로운 내용의 게재, 계급의식의 격화 조장 및 사회불안의 조성 등으로 발행목적을 위반했거나 법정 발행실적을 유지하지 못한 이유” 등을 들어 잡지들을 폐간했다. 폐간된 잡지들 가운데는 ‘선데이 서울’ 같은 대중잡지도 있었지만, ‘문학과 지성’ ‘ 창작과 비평’ ‘씨알의 소리’ ‘뿌리 깊은 나무’ 같은 한국사회의 지성을 대표하는 잡지들도 있었다. 신군부의 척도에서 ‘선데이 서울’과 ‘문학과 지성’은 불온하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부류였으며, 건전한 매체의 반대편 리스트에 속해 있었다. ‘선데이 서울’과 ‘문학과 지성’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한국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입증했다. 신군부 권력은 ‘선데이 서울’과 ‘문학과 지성’ 같은 매체들이 가지는 각각의 문화적 의미를 구별할 만한 분별력을 갖지 못했으며, 이 폭력적인 무지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반복되었다.


지금의 권력자들은 잡지들을 차마 폐간시키지는 못했고, 지원을 배제하는 수준에 머물렀다고 얘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폐간과 지원 배제를 관철시키는 ‘리스트’의 도식성과 피상성은 동일하다. 1988년 이들 잡지들이 복간되었을 때, 1980년의 폐간은 한 시대의 ‘영예’가 돼버렸다.


한국 현대사에서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둘러싼 가장 압도적이고 널리 알려진 이미지의 하나는 이청준의 소설에 등장한다. 소설 ?소문의 벽?에 등장하는 ‘전짓불의 공포’이다. 6·25 당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짓불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어떤 편인가를 선택해야하는 공포에 관한 이야기이다. 국군과 인민군이 낮과 밤 사이로 마을을 찾아들던 극단적인 혼란의 시기, 잠자고 있는 집 안에 들이닥친 자들은 전짓불을 얼굴에다 내리비추며 누구의 편이냐고 묻는다. “어머니는 얼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전짓불 뒤에 가려진 사람이 경찰대인지 공비인지를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절망적인 순간의 기억을, 그리고 사람의 얼굴을 가려 버린 전짓불에 대한 공포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 장면은 이데올로기의 선택을 강요하는 권력의 억압에 대한 공포를 상징한다. 전짓불을 비추는 자들이 언제나 묻고 싶은 것은 ‘너는 어느 편인가’이다. 개인의 고유성이나 사상의 자율성 따위는 이 전짓불의 심문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다.


이청준의 소설이 뛰어난 것은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누구나 자신의 전짓불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전짓불은 이쪽에서 정직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그리고 진술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더욱 더 공포스럽게 빛을 쏘아대게 마련이다”라는 성찰에까지 소설은 도달한다. 이 소설은 ‘전짓불의 공포’가 정직한 진술이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지, ‘정직하고 자유로운 진술’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는지를 사유한다. 권력과 언어에 대한 정교한 질문은 자유로운 진술 자체의 불가능성을 뼈아프게 묻는다.

억압적 체제 다룬 『참을수 없는 존재의…』 ?
억압적인 체제의 이데올로기 앞에서 개인의 언어가 가진 무력감을 보여주는 장면은,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도 등장한다. 아들까지 외면하고 이혼한 자유분방한 의사 토마스는 ‘에로틱한 우정의 불문율’을 나누는 여자들과 함께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하려 하지만, 체코의 정치 현실은 그 가벼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실력있는 외과의사에서 유리창 청소부가 되게 만든 것은 주간지에 투고한 글 한 편 때문이다. 그 글은 오이디푸스 신화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담고 있다. 억압적인 정치권력에 부역하면서 죄를 저지른 인간들은 그 체제의 참상과 죄상이 밝혀진 뒤에 “우린 몰랐어! 우리도 속은 거야! 우리도 그렇게 믿었어! 따지고 보면 우리도 결백한거야!” 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그들이 몰랐다고 해서 과연 그들이 결백한가에 있다.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였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오이디푸스는 자기가 죽인 사람이 아버지이고 자기가 아내로 맞이한 사람이 어머니라는 것을 몰랐지만,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불행의 참상을 견딜 수 없어 그는 눈을 뽑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났던 것”이다.


체코 작가동맹이 내는 주간지에 실리게 된 그 글은 너무나 많이 잘려나가고 그의 생각은 요점만 겨우 남게 되었고(너무 도식적이고 공격적으로), 그것은 더 이상 그의 마음에 들지 않게 된다. 어떤 섬세한 사유도 그것이 요약되면 도식적인 것이 된다. 문학의 언어가 결코 요약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세 달 후 소련이 프라하를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토마스는 ‘공산주의자는 눈을 뽑아야 한다’라고 거칠게 주장한 불온분자가 되어 혹독한 사상 검증을 강요받고 그 글을 철회하라는 요구에 직면한다. 많이 잘려나간 그 글이 자신의 생각을 오롯이 드러내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그 요구를 거절한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가 그 글을 철회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수치심을 느끼게 될까 두려웠고 병원을 떠나야 했다. 시골병원에서 일자리를 찾았을 때 친절하고 예의바른 ‘내무부 남자’가 찾아와 또다시 그를 사상적으로 신문하고 철회서를 쓰도록 제안한다. 그는 다시 사직서를 쓰고 경찰과 사회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내려가 유리창 닦는 노동자가 된다.


필연성의 무게를 거절하고 삶의 우연성을 믿는 토마스가 의사의 지위를 버리면서까지 굳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무엇인가. 토마스는 정치적·윤리적 신념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는 삶의 예기치 않은 잠재성에 몸을 맡기고 싶어했지만, 체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연인 테레사의 정치적 신념과 사랑의 ‘무거움’은 그의 가벼움을 압박했다. 이를테면 그는 어떤 ‘리스트’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뒤에 그가 투고한 주간지 기자와 자신이 외면한 아들이 그를 찾아와 학대받는 정치범들을 위한 탄원서에 서명할 것을 부탁하지만, 이 정치적으로 정당한 요구조차 거절한다. 기자는 자신 때문에 곤혹을 당한 사람이고 아들은 자신이 돌보지 못한 혈육이지만, 그는 서명하지 않는 것 때문에 돌아올 죄의식과 비난조차 감당한다. 토마스의 위치에서 자신의 글을 철회하라는 권력의 요구와 탄원서에 서명하라는 요구는, 그 내용이 다르다 하더라고 똑같이 억압적이다. 그는 자신이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려 하며, 그래서 무언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때 찾아오는 ‘검은 도취감’을 느낄 수 있다. “독신의 경우에만 자기 자신답다”고 생각하는 토마스는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의 세계를 배신하려 했다. 여성을 정복과 수집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이 가당찮은 바람둥이 호색한은 테레사와의 사랑이라는 층위에서는 그 자유와 무거움 사이의 역설을 받아들인다. 이 연인들이 함께한 생의 마지막 시절은 슬픔 때문에 행복했고 그들은 같은 시간에 죽는다.

문학은 고독한 독신의 가벼움에 가까워
여전히 놀라운 것은 아직도 우리가 전짓불과 오이디푸스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전짓불의 권력에 부역했으면서도 심판대 앞에 불려 나와 “몰랐다”라고 주장하는 뉴스 속의 저 난해한 얼굴들 중 아무도 자기 눈을 찌르지 않는다. 저들은 그 무지와 바보스러움 때문에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인가. 이 오래된 의문이 놀랍도록 현재적이라는 것은 절망적이고 섬뜩하다. 어쩌면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것일 수 있으며, 억압적 체제는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 ‘블랙리스트’가 고스란히 ‘화이트리스트’가 되는 역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때 문학은 또 다시 그 화이트리스트의 지배를 거절할 수 있다. 어떤 리스트의 지배도 없는 세계를 문학의 시대는 상상한다. 문학은 고독한 독신의 가벼움에 가까우며, 어떤 리스트에도 속하지 않을 권리는 문학에 남은 최후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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