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증시 사상 첫 거래 마비 "일본 금융 치욕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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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가 안 되는 증권거래소라면 존재가치가 없다."

19일 오전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요사노 가오루(與謝野馨) 금융청 장관은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전날 도쿄증권거래소가 사상 처음으로 처리능력 한계를 이유로 장 마감 20분 전에 모든 종목의 거래를 정지시키자 일 언론들은 "일본 금융 치욕의 날"이라고 비판했다. 현재 도쿄증권거래소의 약정(거래체결 건수) 처리능력은 하루 450만 건, 주문 처리능력은 이의 두 배인 900만 건이다. 17일에는 장 마감 20분 전 약정건수가 438만 건에 달한 시점에서 거래를 중단했다.

도쿄증권거래소 니시무라 다이조(西室泰三) 회장은 "지난해 12월 이후 하루 약정건수가 300만 건 수준에서 움직여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며 "라이브도어 사태로 투자자들의 매도주문이 이처럼 폭주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또 "당분간 오후 개장을 30분 늦추고 하루빨리 약정 처리능력을 하루 700만~800만 건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 언론들은 "명색이 세계 2위 규모인 도쿄증권거래소가 개인투자자들의 데이트레이딩과 신용거래의 급증, 기업들의 주식분할 붐으로 인한 주문량 급증 등 급변하는 시장구조 변화에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며 거래소의 안이한 자세를 비난했다. 실제 도쿄증권거래소는 지난해 11월 1일 컴퓨터 결함으로 4시간 동안 거래 중단 사태가 발생하자 시스템 전반을 총괄하는 최고정보책임자(CIO)를 외부에서 초빙해 차세대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적임자가 없다는 이유로 시간만 질질 끌어 결국 이 같은 전대미문의 사태를 초래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19일 "이번 사태는 자본시장의 상징인 증권거래소가 스스로 시장을 위축시키는 행위를 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며 "국제적으로도 일 증시에 대한 신뢰도를 추락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이번 사태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일 증시를 대거 이탈해 증시 급락→금융시장 불안→경기 급랭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까지 제기하고 있다. 영국의 BBC방송은 "일 경제의 위태로운 모습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대다수 전문가는 "일본 경기회복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워낙 좋기 때문에 이번 거래 중단 사태의 후유증은 오래 가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미쓰비시(三菱)종합연구소의 고토 야스오(後藤康雄) 주임연구원은 "오히려 이번 주가 하락으로 '미니 버블'을 떨어낸 긍정적 측면도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 19일 도쿄 증시는 전날 하락에 대한 반동으로 355.1엔(2.31%)이나 뛰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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