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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층도 ‘왕의 남자’에 끌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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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순제작비 40억대 영화 '왕의 남자'가 수천억대 대작을 물리치고 연말연시 흥행 왕좌에 등극했다. 이 영화의 배급사 시네마서비스는 개봉 20일 만인 17일 전국 관객 500만 명을 돌파했다고 밝혔다. 2000억대 해외 대작 '킹콩'(406만 명.이하 각 배급사 자체 집계)은 물론이고 100억대 국내 대작 '태풍'(420만 명)도 크게 앞지르는 성적이다.

'왕의 남자'는 당초 '태풍'의 절반 규모인 전국 256개 스크린에서 개봉했지만, 입소문을 타고 관객이 몰리면서 스크린 수가 늘어 현재 361개다. 이런 추세라면 지난해 최고 흥행작 '웰컴 투 동막골'(801만 명)의 기록도 넘어설 듯하다.

◆ 중년이 움직인다=인터넷에는 2회 이상 거듭 봤다는 젊은 관객들의 관람후기가 줄 잇는다. 무엇보다 극장 객석에 중장년 관객의 모습이 적잖이 눈에 띈다. 이준익 감독은 "10대 관객은 공길, 20대는 장생, 30~40대는 연산, 50대는 처선 등 세대별로 다양한 인물의 관점을 선택해 볼 수 있는 구조가 관객을 두루 불러모으고, 거듭 보게 만드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왕의 남자'는 천민인 장생과 공길의 광대 패거리가 광대 기질이 넘치는 왕 연산의 궁궐에 들어가 한바탕 놀이판을 벌이는 줄거리다. 여기에 노회한 내시 처선, 광대패의 일원인 육갑.칠득.팔복 등 개성있는 조연이 골고루 영화에 살을 붙인다.

‘왕의 남자’는 극중 동성애 요소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며 여장남자 공길 역의 신인 이준기를 새 스타로 만들어냈다.

젊은 관객은 여장남자 공길을 둘러싼 사랑을 주로 보는 반면, 중장년 관객은 광대놀음에 빗댄 권력풍자의 재미에 주목한다. 매관매직을 일삼는 부패 관료에 대한 풍자극이 등장하는가 하면, 중신에 휘둘리는 연산의 울분에서는 현실정치에 대한 은유도 읽힌다. 특히 "징한 놈의 세상, 한판 신나게 놀다 가면 그뿐"이라는 영화 속 장생의 대사는 왕과 광대라는 권력의 역학관계를 단숨에 뒤집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이런 중층적인 구조와 더불어 사극은 고루하다는 선입견을 훌훌 털어낸 것도 흥행 비결로 꼽힌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더불어 광대놀음 형식을 빌려 수시로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 여장남자 스타를 낳다=영화의 허구적 요소 가운데 여장남자 공길에 대한 관객 반응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수준이다.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온 연산군-공길의 동성애 관계는 본래 제작진이 크게 우려하던 대목이었다. 자칫 관객의 반감을 사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개봉 한 달여 전 여자 뺨치는 미모로 분장한 공길의 모습이 공개되면서 역전됐다. 공길 역의 신인배우 이준기(24)는 연일 인터넷 검색어 수위에 오르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영화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됐다. 주연 배우 가운데 딱히 흥행력있는 스타가 없다는 점 때문에 쉽게 성공을 점치기 어려웠던 '왕의 남자'는 거꾸로 스타를 만들어 내는 힘을 발휘했다.

이 영화의 마케팅을 담당한 정승혜 대표(영화사 아침)는 "3등 전략에 초점을 맞췄다"고 밝혔다. "사전 인지도 등에서 '태풍'이나 '청연'에 밀리는 3등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대신 정공법 마케팅을 펼쳤다"는 설명이다. 배우들의 유명도를 떠나 연산.장생.공길.녹수를 사등분으로 보여주는 포스터가 한 예다. 과장된 수사를 자제하고 캐릭터 자체를 부각한 점이 오히려 관객에게 설득력을 발휘했다는 얘기다.

◆ 악재가 호재 되다=이런 성공에 앞서 '왕의 남자' 역시 캐스팅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장생 역에 내정됐던 배우 장혁이 병역비리 문제로 갑작스레 군에 입대하면서 최종 카드로 감우성이 확정되기까지 7개월여를 허비해야 했다.

촬영 장소도 문제였다. 당초 창덕궁 촬영을 탐냈지만, 연산군 당시 천민 광대가 궁궐에서 공연을 한다는 설정이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문화재청 허가를 받지 못했다.

이 두 가지 악재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 캐스팅 문제로 일정이 지연되는 동안 KBS가 TV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용으로 지은 전북 부안의 궁궐 세트가 완성됐다. 덕분에 세트비용을 절감했다. 순제작비는 41억여원. 의상.세트에 돈이 많이 드는 사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대적인 저예산이다.

이런 여러 가지 면에서 충무로는 '왕의 남자'의 흥행 돌풍을 반가운 반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스타 마케팅.배급력 등 외적인 요소 대신 영화의 진면목이 입소문으로 퍼진 결과라는 것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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