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김정은, 김정일 때가 김일성 때보다 못한 현실 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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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호(사진)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신년사(1일 발표)를 분석해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제출한 보고서를 중앙일보가 5일 단독 입수했다.

태영호, 김정은 신년사 분석 보고서
“능력 안 따라” 자책 표현 나도 놀라
지금까지 신으로 군림하던 그가
북 주민 불만정서 느끼고 있는 것
한·미와 핵동결 타협하더라도
ICBM 개발 위성발사는 협상 안할 것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 공사는 김정은의 신년사를 “지금까지 북한에서 몸담고 살아온 나로서도 정말 놀랍다”고 평가했다. 망명 전인 지난해까지 김정은의 신년사를 암송하며 이행 방안을 고심했던 태 전 공사가 보고서에서 놀랍다는 말을 한 이유는 신년사의 두 대목 때문이었다. 김정은은 신년사 말미에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한다”면서 ‘안타까움과 자책’이라는 표현을 썼다. 또 “‘세상에 부럼 없어라’라는 노래를 부르던 시대(김일성 시절)가 지나간 역사 속의 순간이 아닌 오늘의 현실이 되도록 헌신분투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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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전 공사는 “지금까지 신으로서, 태양으로서 주민들의 머리 위에 군림해온 김정은이 ‘능력이 따라서지 못한다’고 한 건 북한 주민들의 불만정서를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김일성 시대를 지나간 역사 속의 순간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한 것은 북한이 처음으로 현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김정은도 결국 아버지 김정일대(代)는 할아버지 김일성대보다 못하다는 것을 주민들 앞에서 인정한 새로운 주민접근법”이라고 했다.

‘김정은의 자백’ 배경과 관련, 태 전 공사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호소함으로써 정책부재와 실책으로 생긴 현 곤란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을 간부들의 무책임과 부정부패로 돌려, (앞으로) 간부층에 대한 처형과 숙청을 합리화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神)’으로부터 ‘고민하고 있는 신’으로 탈바꿈하려는 것”이라는 것이 태 전 공사의 결론이었다.

태 전 공사는 “김정은 신년사의 메시지는 북한의 현주소를 인정하면 핵동결 수준에서 호상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도 했다. 태 전 공사는 “김정은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판단하는 계기를 3월에 진행될 한·미 합동군사연습으로 삼겠다는 것”이라며 “미국의 새 행정부가 북한이 정말 핵실험을 중지하는지 시험해보자고 하면서 올해 합동군사연습을 임시 중지하는 경우 북한도 추가 핵실험을 하지 않을 공산이 크지만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핵실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실험을 하겠다는 것”이라고 봤다.

다만 태 전 공사는 “앞으로 한·미와 핵·미사일 분야에서 대화가 이루어진다 해도 위성발사 문제는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지 않는다는 입장”이라며 “김정은은 교활하게도 ICBM 개발의 일환인 위성 발사 문제를 (신년사 중 군사분야가 아닌) 과학기술 성과 분야에 넣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김정은은 2016년 한 해 동안 재외공관들에 미사일 문제와 위성발사 문제를 분리시켜 놓아야 한다는 지시를 계속 내려보냈다”고 밝혔다.

태 전 공사는 대북 대응전략도 제시했다. 그는 “지난해 북한에 대한 압박에서 가장 효과가 있었던 것은 주한 미군 가족들의 철수훈련(지난해 11월)이었다”며 “북한은 한국과 미국이 정말 북한과 싸우려 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주한 미군의 동태를 보고 판단하는데 주한 미군 가족들이 태평스럽게 지낸다면 북한은 거짓선전 정도로만 받아들일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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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진행 중인 대북 군사적 압박 외에 유럽국가들을 설득해 외교관계 단절 또는 대사급 관계를 대리대사급으로 낮추도록 하면서 외교·경제제재 수위를 높이고, 유엔의 북한 인권 결의안에 김정은의 이름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이산가족 상봉과 ‘현장분배 입회’(현장 모니터링)를 조건으로 식량지원 등 민간급 교류를 진행하고, 대북심리전을 대폭 강화할 것을 강조했다.

정용수·전수진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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