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11. 미 8군 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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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친구가 사준 전자 기타 덕분에 필자는 미 8군 무대에 설수 있었다. 음악인 신중현을 키운 건 미 8군 무대였다.

전영호는 가죽장갑을 벗더니 가죽점퍼 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세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어느새 내 품엔 전자 기타가 안겨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가물가물했다. 그 친구가 내 눈엔 산타클로스처럼 보였다. 이튿날 그가 사준 전자 기타를 가지고 미 8군으로 달려갔다.

나는 미 8군에서 연습과 실전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했다.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가끔 스케줄이 비는 날엔 영호를 만났다. 만나서 많은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지만 서로 인정하고 존중했다. 같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가 왜 나한테 무턱대고 기타를 사줬는지는 못 물어봤다. 그걸 물어보면 오히려 그 사람의 멋을 인정 안 하는 게 돼버려 곤란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친구 사이에 그런 말은 굳이 필요없었다. 당시 쇼단 사무실은 원효로 일대에 몰려 있었다. 대부분 건물 1층은 악기 창고로 쓰였다. 2층엔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난 그 방에 짐을 풀었다. 한겨울이었지만 난방조차 되지 않았다.

첫 출연이지만 연습도 하지 않고 바로 일을 나갔다. 악보를 나눠주면 그 자리에서 국어 수업시간에 책 읽듯 연주를 해내야 했다. 악보를 보면 식은땀이 났다. 미 8군을 통해 흘러나온 '피스 악보(종이 한 장에 곡 하나가 담긴 낱장 악보)'였다. 미국 유명 편곡자들이 손본 악보라 곡이 품위있고 멋있었다. 당연히 수준도 높았다. 콩나물 대가리가 새까맣게 악보를 채우고 있었다.

중.고교 때 어려운 곡을 많이 연습해둔 게 다행이었다. 어린 녀석이 그걸 다 연주해내니 선배들이 이뻐했다. 실전에서도 합격점을 받은 것이다.

"내가 운은 있구나…"

다행이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한 것이다. 월급 3000원. 그때 돈으로 하루 100원이면 끼니는 해결할 수 있었다. 당시 미 8군에서 바닥급 보수를 받던 악기를 나르는 헬퍼나 조명기사 등도 나보다 두세 배는 더 받았다. 그래도 황송했다. 먹고 잘 곳이 있으니까.

옷을 사 입을 여유까지는 없었다. 늘 검정 군용 코트 차람이었다. 당시엔 남대문 시장에서 군용 코트를 팔았다. 그걸 사서 길거리의 염색 집에 갖다줬다. 물과 검정 염색약을 섞은 드럼통 아래에서 불을 지폈다. 거기에 옷을 넣었다 빼면 검은 물이 들었다. 그걸 입고 미 8군 무대에 섰으니, 지금 생각하면 우스꽝스러운 무대 의상이었다.

처음엔 쑥스러워 악보만 들여다보고 죽어라 연주했다. 색소폰.트럼펫.트롬본 등이 포함된 13인조 빅밴드였다. 초보가 잘난 척할 수 없어 뒷자리에 보일듯 말듯 파묻혔다.

미군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기타였다. 나만 쳐다보는 군인들이 늘었다.

"헤이, 스코시! 플레이 기타 솔로!"

스코시는 일본어로 '조금.약간'이란 뜻이다. 내 키가 작아서 였을 것이다.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다 한국으로 온 미군들이 일본말을 조금 알고 있는 듯했다.

기타 솔로를 멋지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선배들 눈치를 보느라 감히 나서지 못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존심이 상했다. 마치 내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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