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바둑 한 판과 시 한 편의 차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1면

<16강전 1국> ●·판윈러 5단 ○·신진서 6단

16보(182~201)=오래전 내게 프로기사인 가까운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바둑 한 판과 시 한 편의 차이를 모른다.” 군더더기 없는 알맹이의 이 말은, 꽤 오랜 시간 종소리의 여운 같은 ‘울림’으로 남아 나로 하여금 두고두고 곱씹게 하였다. 프로기사니 바둑은 잘 알 테지만, 바둑과 시의 비교는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바둑의 구상은 독서의 사유와 다르지 않다. 깊은 수읽기를 담은 행마는 우아한 문장의 은유다. 이는 조악한 문자의 은유를 질펀하게 풀어 시의 세계를 모호한 안개 속에 가두는 첨단의 현대시(모든 현대시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보다 훨씬 그윽하면서도 명징하다.

82부터 101까지, 굽이굽이 돌아 흑백이 중앙을 빼곡하게 채워 가는데 문득 ‘곡경통유(曲經通幽·굽은 길을 따라 유현함에 닿는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바둑의 이치를 알고 소설 『홍루몽(紅樓夢)』을 읽었다면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을 수 있으리라. 홍루몽에서 차용했으되 더욱 넓고 깊은 의미를 새롭게 담았다. 101 다음 반상 최대의 곳은 상변 백A. 이곳이 큰 이유는 ‘참고도’ 흑1의 비마끝내기가 웅변해준다. 백2로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피해가 더 크다. 흑3, 5 다음 a, b 맞보기로 백이 안 된다.

손종수 객원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