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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인 더 룸 #6

중앙일보

입력

“그동안 내가 선배 생각 얼마큼 했는지 모르죠?”

브래지어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태하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무것도 몸에 걸치지 않은 채로 태하 앞에 있다. 옷 아래 감춰두었던 피부의 여기저기에 태하의 시선이 닿자, 발가락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이제 애송이가 되었구나. 카페에서 태하에게 타박을 주던 나의 모습은 사방이 막힌 이곳에선 찾아볼 수가 없다. 과감하게 팬티 속에 손을 넣었던 어젯밤을 떠올리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은 손끝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는다. 태하가 내 몸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세우며 미소 지었다. 면접관 앞에 선 신입사원이 된 느낌이다. 침대로 눕히려고 어깨를 붙잡는 태하를 잠깐 멈춰 세웠다.

“태하야, 잠깐만.”

볼륨을 가장 낮게 설정한 영상처럼 목소리가 겨우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나는 절뚝거리며 일어나 콘돔을 찾으려 방 여기저기를 살폈다. 벌거벗은 몸으로 절뚝거리는 나체를 볼 태하를 생각을 하니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재빨리 찾아 태하에게 내밀었다.

“사정할 때 낄게. 괜찮죠?”

“안 끼면 못해, 얼른 껴.”

“오늘 우리 첫날이잖아. 걱정 마요. 내가 알아서 할게.”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만두고 싶어졌다. 태하는 내 손에 든 콘돔을 빼앗아 탁자 위에 던졌다. 그리고 다시 눕히려 했지만 한 번 더 이야기했다.

“태하야. 조심해야 돼. 혹시라는 게 있잖아.”

“선배.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가만히 좀 있어 봐요.”

남자들은 어디에서 저런 당당함을 배운 걸까. 산에서 만났던 사내들이나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다시 순종적인 여자 행세를 했다.
태하의 손가락이 장난으로 어린아이의 볼을 꼬집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시 옷을 입고 싶은 마음이 마음속에서 일렁였다. 미간을 구겼지만, 소리를 내지 않았다. 태하는 이미 상냥함을 내려놓았다. 가슴과 유두를 마음대로 매만졌다. 얼굴 위에 흩어진 긴 머리를 조심스럽게 귀 뒤쪽으로 넘기며 태하가 눈을 맞췄다.

“시오 너 이제 내꺼다.”

이 방을 박차고 나간다면 다시는 태하를 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영영 불편한 관계가 될 것이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태하의 입에서 미소는 사라졌고 목과 귓불은 질펀하게 침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 정사를 치른다고 해서 몸이 닳거나 죽지는 않는다. 내가 조금 양보하면 된다. 입술이 가슴 위에서 멈췄을 때는 시체처럼 숨도 쉬지 않고 눈을 감았다. 조금씩 태하가 몸의 굴곡을 따라 아래로 향한다. 눈을 떠 수북한 태하의 머리카락을 쳐다보았다.

“태하야, 우리 다음에 하면 안 될까?”

“다음에도 하고 지금도 해요.”

암캐와 수캐가 서로 밑이 붙어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던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밀폐된 동굴 속에서 무방비한 상태로 벌거벗고 있는 두 짐승. 태하는 조금은 화가 난 듯 다시 입술을 헤집고 혀를 밀어 넣었다. 화가 난 쪽은 나여야 하는데. 태하는 내 양쪽 팔을 자신의 팔로 제압한 채 몰래 숨겨놓은 퍼즐의 마지막 하나를 찾으려 했다. 단단해진 태하의 남자가 치골에 닿았고 몸을 비틀었다. 막다른 골목인 줄 알면서도 따라나선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다리는 경직되었고 태하가 들어올 수 없게 막으려 했지만 태하는 조금도 그것을 느끼지 않으려는 듯했다. 한쪽 팔로 내 허벅지를 올렸고 격렬한 통증과 함께 태하가 경직된 몸을 뚫고 들어왔다.
무례한 호랑이처럼 태하는 거친 숨을 내기 시작했고 늑골에 얼굴을 비비며 더욱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압사당하는 느낌을 받으며 아직은 다 내려놓지 못한 마음 때문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5분쯤 지나자 태하는 마지막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태하는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 미치겠네. 시오야. 시오야.”

“태하야. 그만!!!”

태하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 음부에서 태하의 맥박이 느껴졌다.
격렬하던 태하는 움직임을 멈췄고 거친 숨은 이내 부드러워졌다.

“안되는 날이야?”

“…안된다고 했잖아..”

“…”

잠시 뒤 태하는 옆에 누웠다.

“...드디어 했네. 드디어. 하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태하는 겨우 제정신을 차린 듯 보였다.

“오늘 위험할 수 있단 말이야. 어쩌려고 그랬어. 하지 말라고 말했잖아.”

“담부터 콘돔 낄게. 오늘은 처음이잖아.”

“내가 싫다는 데도 그게 좋으니?”

한동안 태하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직 임신시킨 적 없어. 너무 걱정하지 마요. 아이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더 짜릿하잖아. 선배는 안 그래? 임신하면 같이 살지 뭐."

태하가 반대쪽으로 몸을 비틀고 잠든 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다리를 절뚝거리며 옷을 하나씩 주워 입었다. 바닥으로 잡아당기는 뱃속의 묵직한 추 같은 것이 자꾸만 몸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잠든 태하를 두고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은 뒤 방을 나왔다.

혼자서는 쉽게 도달할 수 있었던 오르가슴이 남자와는 절대 함께하지 않았다. 태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남자와의 섹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걸까.

예전에, 질에 염증이 생겨 병원에 갔던 일이 있었다. 의사는 진료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가슴 밑으로 커튼을 내린 채 음부의 여기저기를 헤집었고, 나는 커튼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의사의 손길로 추측할 뿐이었다. ‘조금 불편하실 수 있어요.’ 라고 말하고는 소독 냄새가 나는 차가운 장비를 질구에 넣는다. 나는 무기력한 생물체가 되어 꼼짝을 못한 채 질구의 감각에만 신경을 집중한다. 몇 번은 의사 한 명이 아닌 다수가 지켜본 적도 있었다. 스르르 차가운 장비가 몸 바깥으로 빠져나간 후 의사는 음부를 헤집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의자에 앉아 상담을 시작한다. 염증에 대해서 주사제와 약을 처방해주고 진료를 끝내는 의사도 있었고, 섹스를 할 때 편한 상태로 자연스럽게 시도하라고 고언하는 의사도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와 마주 앉아 있을 땐, 옷을 홀딱 벗고 침대에서 신음하던 여자의 모습으로 그들 앞에서 교성을 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의사의 머릿속에서 포르노 한편이 상영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할 때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수치가 얼굴에 몰려드는 것 같았다. 섹스를 거부하지 못했던 한 가지의 다른 이유는 그들과 연관된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패를 반복하던 육체적인 결합에 회의를 느낄 때쯤 은행에서 집어 든 잡지를 살펴보니 불감증 상태의 여자는 남자들이 부담스러워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처음 섹스를 했던 날, 시체처럼 누워만 있었던 기억이 나 다음부터는 남자의 반응에 동요하는 듯 연기를 했다. 나중에는 연기가 능숙해졌다. 섹스를 하는 사람인지 침대 위의 배우인지 스스로 착각하는 날도 있었다. 연기가 훌륭해질수록 남자들은 세상을 집어삼킨 듯 어깨를 으쓱였다.

스킨십 자체가 나쁘게 느껴지진 않았다. 외딴 방의 소녀가 아무나의 품이 그리웠던 것처럼, 배고픈 친구에게 내 도시락을 내어주듯 두 번째부터는 어렵지 않게 몸을 허락했다. 아니, 허락이었는지 그냥 NO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개구리 자세로 팔딱팔딱 제자리 뛰기를 한 남자들은 사정하고 내려와 한결같이 어땠냐 묻는다. 그러면 나는 내 허기는 신경 쓰지 않고 도시락을 나눠준 정에 굶주린 착한 소녀로 빙의 되어 좋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행복한 표정으로 파트너와 키스를 했다. 통증이 밀려오는 섹스를 했을 때도 아팠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니, 고통이 없는 섹스는 없었던 것 같다. 고통이 아주 심했던 날에는 트라우마처럼 돼지 노래가 자는 내내 꿈속에서 머릿속을 휘저었다. 섹스가 없는 이성 관계가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처음 관계를 했던 여관에서는 공터의 낙서 때문에 따귀를 맞았던 기억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차마 옷을 벗을 수 없어 상대와 한참 고집스러운 실랑이를 했다. 네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지만, 옷을 벗기가 너무 두렵다고 말하며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 시선이 닿은 곳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내가 원하는 답은 없었다. 버림받기 싫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창문을 몇 번이나 살펴보고 이불 속에서 발끝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신경을 집중했다. 헐떡거리는 남자보다, 처녀를 내어주는 순간보다, 내가 집중했던 것은 어디에선가 지켜보고 있는 낯선 광기의 눈빛이었다.

태하와 관계를 한 이후 몇 주 뒤, 검붉은 핏방울이 마음 졸이며 기다린 분실물처럼 팬티에 묻었을 때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태하와 잔 것이 크게 후회가 되지는 않았지만, 계속 오는 태하의 연락은 받지 않았다. 일자리를 찾으려 면접을 보는 것 외엔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고, 내 방에서의 시간은 다 잠기지 않는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방 안으로만 흘러내렸다. 사람들과는 거리를 둔 채, 나 자신에게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

차가워진 날씨를 살갗은 당황스러워했다. 시간이 꽤 흐른 것을 나 혼자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얇은 가디건 한 장으로 날씨를 견디기에는 모질었다. 오랜만에 바라본 하늘은 대낮임에도 머리가 닿을 것만 같았다. 퇴근 시간에만 왕복했던, 사람들이 빽빽했던 도로는 여기저기 쉼표가 즐비한 문장처럼 여유가 가득했다. 문이 항상 열려있던 전파사에는 외출 중이라는 안내문이 걸려있었다. 며칠간 깜빡이던 전등을 교체하기 위해 결국은 큰 길가까지 걸어 나갔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대라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느렸고 길가엔 나이 든 사람들이 많았다. 두꺼운 패딩 잠바를 입은 황혼의 부부는 날씨가 아랑곳하지 않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해파리의 헌 옷을 입고 있던 엄마 생각이 났다. 생활비를 독촉하는 전화가 엄마에게 자주 걸려왔지만, 열심히 일자리를 찾고 있다는 말로 일관했다. 생활비를 달라고 말하는 것에 짜증이 났지만, 전화를 끊고 나면 미안한 마음은 가슴 한구석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대로 더 걷다가는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여름 슬리퍼에 양말을 신지 않은 발가락은 이미 감각이 없었지만, 기어코 형광등을 사겠다는 결심이 몸을 에이는 추위보다 이상하리만치 강했다.

전파사를 찾으려 상가를 유심히 살펴보던 중 따뜻한 외투가 걸려있는 옷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따뜻한 새 옷이라도 사 입어야 할 것 같았다. 행거가 진열된 상가 앞에서 두리번거리던 중 붉은 잠바 옆에 지저분하게 죽어있는 화단의 꽃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거미가 움직이는가 싶었다. 무언가 정신없이 파닥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벌새 하나가 메마른 화단에서 꿀을 찾는 듯 바쁘게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산에서 놀기 좋아하던 어린 시절 이후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벌새였다. 벌새 이름을 알려준 것은 오물오물 이야기하던 미영이었다. 오물거리던 귀여운 입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여름철에도 도시에서는 한 번도 벌새를 본 적이 없었다. 무척 반가웠다. 어린 시절 배회하던 미영이의 집 앞으로 다시 걸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내 작은 날개로 겨울을 버텨내는 모습을 보니 반가움이 사라졌고 추위에 떨고 있는 내 처지보다 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손으로 꼬옥 감싸 어릴 적의 미영이와 내가 천진하게 놀던 야생화가 가득한 숲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이 추위에는 얼마 못 가 죽을 것이 분명했다. 순식간에 벌새는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화단을 떠났고 나는 벌새가 사라지는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못 가 벌새가 사라진 곳에서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검은색 하늘거리는 남방 하나만 입은 채 무관심한 듯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계절을 감지하지 못하는 듯, 겨울에게 나약한 냉소로 버텨온 듯한 큰 키에 마른 체형. 겨울 찬바람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산에서 보았던 가죽 잠바의 사내가 나이 먹는 것을 잊은 채 그대로 서 있는 느낌. 아니, 그는 거리로 배설되는 음악을 어미의 젖처럼 빨고 자란 듯 도시의 폐허를 닮아있었다. 산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도시의 자궁에서 쾌락으로 이용당하다 점차 말을 잃은 듯한. 아버지의 황망한 영혼과 엄마의 어리숙함마저 아무렇지 않게 취급할 무덤덤한 몸짓.

그가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가 불길에 제 살을 태우는 듯, 연기가 슬픈 연주처럼 보이기 시작 있었다. 다시 두 번째 담배는 남김없이 밑동까지 타들어 갔고 백 명의 고단한 사내의 발길처럼 슬리퍼로 담뱃불을 비비고는 사라졌다. 고양이가 장난으로 풀어놓은 빨간 실타래의 끝을 붙잡고 숨어버리듯 그는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최면에서 깬 사람처럼 그제야 낯선 외국인이 부르는 캐럴과 스산한 겨울바람을 체감했다. 나도 모르게 어질러진 실타래의 덩어리를 천천히 감는 기분으로 그가 사라진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쓰러져가는 간판이 눈에 보였다. 헐벗은 여인이 건물 위에 떨어질 듯 매달려 있었다. 텅 빈 계단에서 그가 당장에라도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도시의 오선지 위에 천천히 하얀 겨울 음표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겨울, 몹시 추운 겨울이다. 눈이 천천히 떨어지던. 내가 그를 처음 본 그날. 사진으로만 보던 거대한 사막의 목초 더미가 굴러다니는, 도시의 소음으로 아우성치는 환각이 시작되었던 그날. 그를 처음 본 그곳은 세상이 버린 듯 쓰러져가는 진부한 워딩, '오션 시네마' 앞.


작가 소개  
조금 어린 나이의 결혼 그리고 빠른 나이의 이혼, 통신회사, 콜센터, 어학원 운영 중 경영악화로 빈털터리가 됨. 2년간 낙오자라는 패배감으로 자폐적인 시간을 보내던 중 무작정 세계 여행을 시작. 1년 정도 해외 여행 중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 성을 사회적, 문화적으로 조망하는 시와 수필을 SNS에 연재 중이다.

<아스팔트에 핀 꽃> 동인 시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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