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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특집 분단의 이면<하> 신복룡교수, 미서 한국관계 비밀문서 추적|휴전뒤엔 밀사들의 목숨건 잠행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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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외교에는 비밀이 없지만 협상은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 오늘날 협상의 내용이 외부에 누설됨으로써 방해를 받거나 좌절되는 예는 허다하다.』
이는 외교관이며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였던 「니콜슨」 경이 남긴 경구다.
「비밀스럽다」는 것은 일단 그 어의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제문제에 있어 수많은 협상들이 막후에서 은밀히 처리되었다. 그중 어느 것은 영원히 비밀로 묻혀버린 것도 있고 또 어느 것은 먼훗날 세상에 밝혀진 것들도 있다.
한국전쟁을 논의함에 있어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기원을 밝히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고 일부 전사가들은 그 진행 과정을 논의했지만, 휴전협정은 1950년6월23일 유엔주재 소련대표「말리크」(Y.A.Malik)의 제안에 의해 개시되었다는 사실과 포로 교환에 관한 지루한 설명을 거쳐 체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한국휴전협정은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각국 대표들이 협상 테이블에 나오기까지에는 밀사들의 죽음을 건 잠행이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흘러가는 말처럼 구전되기도 하고 당사자들의 필설로 간혹 소개되기도 했으나, 최근에 이르러 「정보자유법」(FOIA) 에 의하여 미국의 기밀문서들이 해제됨에 따라 그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이 당시 밀사들의 활약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볼 수가 있다.

<중공유엔가입 카드>
첫 번째 밀사는 모택동과 협상하기 위해 미국 국무생이 중공에 밀파한 「마셜」(Charles B.Marshall)로부터 비롯된다. 한국전쟁은「불각의 전쟁」은 아니었지만 그 막후의 조종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당시 미국 전략가와 첩보당국은 몹시 당황해었었다.
그러던 차에 서울수복의 승리감도 잠시뿐 곧이어 10월29일에 중공군의 대대적인 참전으로 패주하면서부터 미국의 전략전문가들은 한국전쟁의 막후 조종자가 모택동일는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했고, 비록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었다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영토수복에 성공한 그들은 전쟁효과가 체감되는 차제에 전쟁을 여기에서 멈추기 위하여 중공과 비밀협상을 벌이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했다.
이 비밀협상을 최초로 착안한 인물은 국무성 정책기획 참모국(PPS)국장인 「니츠」(P.Nitze)였다. 그는 중공과의 협상에 관한 안건을 국무장관 「애치슨」(D.Acheson)으로부터 재가를 얻어 자기의 국원인 「마셜」을 밀사로 선임했다. 전직 하버드대 교수였던 「마셜」은 이미 1949년에「한국원조법안」(Korea Aid Bill)을 기초한 경험이 있고, 1950년말 미국을 방문한 중공의 유엔 업저버를 만난 일이 있으며, 중국 문제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조건 때문에 밀사로 선임되었다.
그에게 부여된 과업은 모택동을 만나 한국전쟁의 휴전을 교섭하되 미국측에서 제시할 수 있는 카드는 중공의 유엔가입을 묵시적으로 긍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마셜」은 1951년5월 첫주에 마닐라를 거쳐 보안상 배편으로 홍콩에 도착하여 영사 「클러프」(R.N.Clough:현 존스 홉킨즈대교수)와 총영사「매카나기」(W.F.McConaughy:현 주한미국대사), 그리고 현지에 주재하는 중앙정보국 (ClA) 요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모택동을 면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마셜」 이 최초로 접선한 인물은 장국도였다. 중공의 전정치국원이었으며 당시 홍콩에 추방되어 있던 장국도는 전력에 비하여 역할의 가능성이 빈약했다.
두 번째 접선인물은 「대공보」사강인 「초우」(Eric Chow)였는데,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중공의 권력핵에 접근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밖에 그는 모택동의 은사의 한 젊은 제자를 만났고, 모택동 부인 친구의 남편 되는 사람을 만나 모택동과의 면담을 주선해주도록 부탁했으나 교섭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는 4주동안 홍콩에 머무르면서 백방으로 노력했지만,중공에서도 휴전을 원하고 있다는 어렴풋한 정보만을 얻었을뿐 그 이외의 소득이 없이 귀국하고 말았다. 왜 모택동이 「마셜」 의 면담을 거절했는지는 중공측의 기록이 공개되지 않는 한 밝혀질 수 없는 것이지만 현재로서 추정이 가능한 이유로서는 당시 중공은 안보리의 대표권과 중화민국의 축출을 생각하고 있는터에 단순한 유엔가입의 카드로서는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가 없없다는 점,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한 유엔결의의 주동자가 미국이었다는데에 대한 적의, 그리고 미국으로서는 전쟁의 효과가 체감하고 있는 반면에 신생국으로서 국제 무대에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찾고있던 중공으로서는 미국에 비하여 전쟁의 효과가 체증하고 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중공 비밀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 국무성은 그렇다면 한국전쟁의 막후 조종자가 소련일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로는 파리 대사관의 「볼렌」(C.E.Bohlen)이나 주한미국대사「무초」(J.J.Muccio)등이 휴전을 외해서는 소련과 비밀 접chr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했고, 재야정치인으로서는 「케난」(George F.Kennan)이 대소협상을 「애치슨」 에게 빈번히 권고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 당시 인도의 「네루」(J.Nehru)가 여러 차례에 걸쳐 한국휴전을 중재하겠다는 뜻을 미국과 중공에 개진한 바 있었지만 미국은 기본적으로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고있었다.
미국은 이미 38선을 돌파하여 실지를 회복함으로써 강대국으로서의 최소한의 체면을 찾게되자 「애치슨」 은 지금이 곧 대소휴전 교섭의 적시라고 생각하고 1951년5월18일 당시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학을 강의하고 있던 「케난」 을 워싱턴으로 불렀다.
전직 국무성 관리였던 「케난」은 미국의 정가에서 소련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음으로 양으로 미국의 대소 정책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애치슨」 은 「케난」에게 비밀리에『미스터 X를 만나 한국전쟁의 휴전을 교섭하라』 는 밀명을 내렸다. 여기에서 「미스터 X」라 함은 「말리크」의 암호명이었다.

<참가국·의제 언급>
밀명을 받은 「케난」은 5월26일 자기와 친면이 있는「차랍킨」(S.K.Tsarapkin: 당시 UN주재 소련측 교체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와 「말리크」의 비밀회동을 주선해 주도록 부탁했고, 「차랍킨」은 5월29일의 답전에서 5월31일에 롱아일랜드에 있는 「말리크」의 공관에서 회합을 갖고자 한다는 뜻을 전했다.
5월31일 오후에 「말리크」의 빌라를 방문한 「케난」은 그와 함께 2시간반에 걸친 대화를 가졌다. 대담의 시간이 이토록 길었던 것은 그 내용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말리크」가 본국의 정보요원들이 자신의 공관에 장치했을는지도 모르는 도청과 녹음을 의식한 나머지 주제와는 무관한 장황한 정치선전을 했고 또 세부사항에 관해서는 본국정부의 훈령이 없이 자의로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케난」은 술회하고 있다. 첫 번째의 회동은 주로 「케난」측에서 말을 많이 했고 뚜렷한 결론이 없이 헤어졌다.
첫번째의 모임이 결론 없이 헤어졌다고는 하지만 미국으로서는 그것이 무익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말리크」가 『새로운 사실이 없다』고 푸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회동을 통해 소련이 한국전쟁을 통하여 중공이 국제무대에 부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하는 의지를 「케난」은 확연히 읽을 수 있었고, 소련이 협상테이블에 참석할 뜻이 없음을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6월5일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케난」은 역시 한국전쟁의 휴전문제를 거론했고, 「말리크」는 주로 미·중공관계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쪽에서 문제에 접근했다. 그들은 끝내 한국의 빠른 정전이 피차에 유리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며 정전회담의 참가국, 의제, 정전 감시국의 범위에까지 언급했다.
이 회동이 있은지 18일후인 6월23일 「말리크」는 한국전쟁의 휴전을 제안했다. 밀담의 경위로 볼 때 「말리크」는 노회한 「케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실제로 휴전이 다급한 것은 미국측이었고 이미 확전은 금기로 된 상황에서 미국은 자신에 필요한 사항을 「말리크」의 입을 통해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체면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여느 회담과는 달리 휴전(정전 또는 종전) 회담은 의제의 토의도 중요하지만 적대국이라고 하는 감정적인 이유로 인하여 협상 테이블에 양측이 마주 앉기까지의 과정이나 경로가 협상 자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케난」의 공로는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다. 그러나 판문점에 마주 앉은 이후에도 그들의 적의와 이해관계는 문제를 쉽게 풀도록 해주지는 않았다.
「회담강의 언성과 전선의 총성」(truce tent and fighting front)은 함께 들리고 있었다.

<김일성 심중 읽어라>
정전회담의 교착상태는 현지의 군지휘관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고, 그들은 이 전쟁의 주인공인 김일성의 심중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채널이나 첩보망이 없던 차에 유엔군 사령부에 박진목이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전 남노당 경북도당의 요인이었던 그는 1·4후퇴 이후에도 서울에 남아 있었다. 박씨는 적치하인 1951년 1월25일에 그가 평소 존경하던 독립운동가 최익환과 함께 북한의 사법상이며 대남총책인 이승엽을 만나 동족상잔의 종식을 호소한바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승엽은 종전의 문제에 관해서는 기본적인 입장을 같이하면서 박씨에게 이승만의 신임장을 요구했고 이를 얻기 위해 그가 부산으로 내려가던 차에 전세는 바뀌어 북한군은 퇴각하였다. 다시 한국군 치하에 있던 박씨는 전 연희대 교수이며 당시 유엔군사령부의 통역을 맡고 있던 이용겸의 주선으로 미군 첩보원과 만나게 되었으며 그 자리에서 미군측은 박씨에게 평양에 잠행하여 정전을 교섭해줄 것을 부탁했다.
1951년7월28일에 미군측의 주선으로 전선을 넘어 월북한 박씨는 이승엽을 만났고 그 해 9월8일에 남한으로 돌아왔다. 그가 북한에서 받은 요구는 최익환이 입북하여 휴전조건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최익환은 미군의 협조를 얻어 1951년12월 입북했다. 최익환은 북한에서 김일성이나 이승엽을 만나지 못한채 1953년5월에 남하했다. 그 동안 그는 평양 근교의 어느 농사시험소에 유폐되어 세뇌를 받았다.

<김일성·박헌영 암투>
이승엽이 최익환과의 휴전막후교섭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당시 북한의 권력투쟁과 함수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있다.
미군정청의 체포위협을 피하여 1946년10월에 월북한 박헌영은 해주에 머무르면서 남노당을 지휘하고 있었으나, 남노당의 당세는 날이 갈수록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김일성과 권력투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남노당의 당세를 허장성세 했고 「남조선해방」(대남전쟁) 이라는 테제로써 김일성의 권좌에 도전했다. 김일성은 끝내 대남전쟁을 개시했지만 박헌영의 허세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언했던「남조선에서의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당의 투쟁노선을 둘러싼 갈등에서 수세에 몰리고 있던 김일성은 대남전쟁의 실패에 대한책임을 박헌영에게 전가할 기회를 찾고 있던중 이승엽이 이른바 「미제의 간첩」인 박진목씨· 최익환과 접선한 사실이 밝혀졌고, 이는 박헌영·이승엽이 몰락하게되는 결정적인 단서로 이용되었다.
이미 1952년부터 박헌영·이승엽이 실세에 빠져있던 상황에서 월북한 최익환이 그들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고 이에 따라서 최익환-이승엽의 종전협상은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남하한 박진목씨는 그후 간첩죄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최익환은 반휴전론자인 이승만의 치하에서 자신도 모르게 북진통일에 반하는 행동을 취했다는 이유로 이승만으로부터 모진 고초를 겪다가 1959년 아사나 다름없는 죽음을 맞이했으며, 이승엽은「미제의 간첩인 박·최에게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목으로 1953년에 처형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역사의 제물이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세 번에 걸친 밀사들의 활약중 구체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케난」 의 활약뿐이었다. 「마셜」의 밀항이 실패한 것은 판단의 실수와 외교수완의 미숙에 그 원인이 있었다. 박진목씨와 최익환의 밀항은 가장 순수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소득이 없었으며, 적과 아측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신당했다는 점에서 가장 비극적이었다.
그러나 역사란 존재했던 사실의 기록도 중요하지만 그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의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점에서 볼 때 「마셜」도, 박진목씨도, 그리고 최익환도 한 시대의 어느 장엔가 모름지기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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