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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장을 잃고 산에 대한 미련도 함께 버렸다 이제 그를 보내줘야 할 것 같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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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4호 8 면

강정현 기자

한겨울, 팬티만 입고 창문을 열어둔 채 잤다. 살을 에는 바람이 창으로 들어왔다. 아침에 일어나면 방 안 대야의 물이 꽁꽁 얼어 있었다. 그런 아들을 보는 어머니는 기겁을 한다. 탐험가가 되기 위해 한겨울에도 창을 열어 놓고 잤다는 아문센을 존경하는 한 소년이 그랬다. 소년은 자라서 산악인이 되었고 세계 최초로 산악인의 꿈인 그랜드 슬램(세계 7대륙 최고봉, 히말라야 8000m급 14개 고봉, 에베레스트, 남극, 북극의 지구 3극점 정복)을 달성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산속으로 사라져 전설이 되고 만다. 산악인 박영석(사진)이다.


그가 산사태로 히말라야 설산으로 사라진 지 5년, 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지난 8월 일군의 무리들이 히말라야로 떠났다. 박영석을 좋아했던 사람들이다. 그 중엔 히말라야 다큐 PD로 활약하고 있는 신언훈(62) 감독과 박 대장의 아들 박성민(21)도 있다. 신 감독은 트레킹여정을 카메라에 담아 최근 방송(SBS ‘아버지의 마지막 산’)했다. 이들에게 ‘히말라야의 별’이 된 박영석은 어떤 존재로 남아 있을까.


-이번에도 실패했다. 박영석 대장은 지금쯤 어느 얼음 속에 잠들어 있을까. “우울하다. 이제 시신을 찾는 것은 아예 불가능해졌다. 빙하는 여름철에 급격히 이동한다. 어느덧 5년이다. 어디쯤 누워 있는지 좌표조차 찾기 힘들게 됐다. 수색 범위가 넓어져 안나푸르나 전체를 뒤져야 한다. 이제 그를 보내줘야 할 것 같다. 실낱 같은 희망을 가지고 그토록 예뻐했던 막내아들까지 데려갔지만 실패했다. 그는 산으로 돌아간 것이다. 육신은 차가운 히말라야 얼음장 속에 있지만 영혼은 지금쯤 정들었던 서울 거리나 설악산·한라산을 거닐고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박 대장과 함께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른 사람은 박 대장이고 그런 박 대장을 대중에게 널리 각인시킨 것은 신 감독이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논산훈련소에서 배운 군가 ‘진짜 사나이’를 생각하면 된다. ‘섬집아기’ ‘바우고개’를 작곡한 이흥렬 선생이 작곡한 국민 군가 ‘진짜 사나이’에 딱 떨어지는 인물이다. 사나이라는 말은 요즘에 듣기 어렵다. 어딘지 좀 덜 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 또 꼰대들이 쓰는 말 같기도 하다. 주변에 사나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나이가 무언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챙기고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의리의 인간이다. 사나이라는 말에는 우정, 남자다움, 눈물, 사랑, 낭만의 이미지가 함께 있다. 요즘 문제시되는 ‘마초이즘’까지 은근히 풍긴다. 박 대장은 그에 딱 맞는 사람이다. 사나이란 이름 아래 어울리는 모든 것을 그는 지녔다.”


-신 감독도 산 사나이인가. “아니다. 나는 다큐멘터리스트, 즉 기록자다. 1990년 초 일본 연수 시절 NTV의 개국 50주년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보게 됐다. 일본 등산가들이 초모랑마(에베레스트 현지어, 세상의 어머니란 의미)를 오르는 일정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편집·조작 없이 연출자의 어떤 의도도 개입되지 않는, 말 그대로 노커팅(No Cutting) 다큐멘터리였다. 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 실시간으로 안방으로 중계되고 있는 것이다. 필이 꽂혔다. 나도 이제 초모랑마로 가야겠다. 그래서 히말라야 등 극지 탐험을 영상에 담는 데 일생을 보냈다. 아니 내 인생을 몽땅 바쳤다고 봐야 한다.”


-기록을 살펴보니 웬만한 산 사나이 못지않다. “히말라야는 물론이고 남극·북극 등 극지도 다녀왔다. 2011년 10월 18일 박 대장을 잃고 산에 대한 나의 미련도 함께 버렸다. 등산은 마약과 같다. 빠져들면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다큐는 엔딩을 고민하며 생각하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등반은 아무도 모른다. 그 누구도 서사의 끝을 알지 못한다.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 없다. 숨죽이며 결과를 기다릴 뿐이다. 산악 등반 다큐멘터리의 매력이다.”


-히말라야를 오르는 것이 세계적으로 하나의 현상이 되어 버렸다.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불어닥친 시대적인 현상이다.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시대가 끝나자 강대국들은 고봉과 극지 탐험을 통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게 된다. 이른바 봉우리 식민지 현상이다. 저마다 탐험대를 히말라야나 남북극 오지에 보내 자국의 힘을 과시하고자 했다. 최초라는 두 글자를 위해 목숨을 건 인간들의 무모한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히말라야 고산들이 모두 정복되자 이제는 등반 루트를 새로 개척해 이름 붙이는 경쟁이 시작되고 있다. 박 대장도 그중의 한 사람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는 한국인이다. 그래서 히말라야 설산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는 것이 꿈이었다. 등반로 탐색을 나섰다가 기상 악화로 하산 도중 안나푸르나 5700m 지점에서 2명의 대원과 함께 눈사태로 사라졌다.”


-전문 산악인들의 도전이 예전만 못하다. 보통 사람들의 히말라야 등반 붐은 여행사마다 만원이지만. “산악인에 대한 대접이 예전 같지 않다. 에베레스트를 최초에 오른 고상돈 같은 산악인은 국민적인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그 역시 산으로 사라졌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다. 도전정신이 사라지고 있다. 영국을 보라. 험지 등반에 성공하면 왕실에서 ‘sir’라는 경칭과 함께 귀족 작위까지 수여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스폰서 구하기가 정상 정복보다 힘들다. 히말라야 산들을 오르려면 입산료만 6만 달러다. 물론 환경부담금, 사고 수습 경비 등이 포함되어 있지만 만만치 않은 액수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지금 엔터테인먼트에 함몰되어 있다. 떨어지는 바위를 산 정상까지 포기하지 않고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적인 인간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 없는 공간, 깊이 없는 시간’과 싸우는 용기는 지금의 시대에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도전이 없는 민족은 쇠망한다. 그것은 역사가 보여준 엄연한 교훈이다.”

1 트레킹 첫날 해발 2142m 피탄 데우랄리 로지에서 대화하는 신언훈 감독(왼쪽)과 박성민씨.

2 히말라야에 잠든 고 박영석 대장과 신동민·강기석씨 등 3명의 산악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탑. 일행은 등반에 앞서 이 추모탑 앞에서 추모제를 올렸다. [사진 신언훈]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영석은 고2 때 마나슬루 등정대 환영 인파에 필이 꽂혀 산 사나이가 됐다. 93년 아시아인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무산소 등정한 이래 전 세계 산악인의 꿈이자 목표인 ‘산악 그랜드 슬램’을 세계 최초로 달성했다. 2011년 10월 18일 신동민·강기석 대원과 함께 안나푸르나에 코리안 루트 개척 도중 산사태로 빙하 속으로 사라졌다. 수차례의 수색작업도 허망하게 배낭이나 피켈은커녕 장갑 한 짝도 찾지 못했다. 2015년 네팔 대지진으로 인해 그가 떠난 자리마저 희미해졌다. 그는 이제 완전히 산속으로 사라져갔다.


-이제 아들에게 한번 물어 보자. 어느 날 훌쩍 산으로 떠나버린 아버지가 밉지 않나. “섭섭한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번 시신 수습을 위한 등반을 통해 원을 풀었다. 제사도 모시고, 부자지간에 해원(解?)을 한 셈이다. 아버지는 가끔 말씀하셨다, 내 영혼의 고향은 히말라야라고. 그렇게 산을 좋아하셨으니 아마 산에 누워 계시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추억은 뭔가. “아버지는 일류 요리사였다. 아버지가 만들어 준 김치말이 국수를 잊지 못한다. 아버지는 내게 산이다. 잘 모르던 아버지, 그저 1년에 몇 번 보던 아버지를 스무 살이 넘어서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이번 산행으로 부쩍 커진 느낌이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오오오….’ 검은 밤, 에베레스트 텐트 속에서 나는 아버지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들었다. 어느덧 5년, 아버지의 육체는 이제 사라지고 당신이 신고 있던 등산화 정도만 안나푸르나 어느 기슭에서 외롭게 잠들고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야 나도 산 사나이가 되고 싶다. 하지만 어릴 때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다친 인대 골절로 불가능해졌다. 가끔 찾는 한라산·북한산에서도 나는 아버지를 느낀다. 오늘 따라 아버지가 무척 그립다.”

신언훈 감독은 ?다큐멘터리 PD 출신이다. 경기고,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이래 다큐멘터리에 평생을 매달렸다. 우연한 기회에 박영석과 만난 이래 형제처럼 지냈다. 함께 산을 찾은 것도 여러 번이다.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앞장서 나선 이번 수색작업(2016 안나푸르나 추모원정대)은 그와 박영석 대장 간의 우정이 낳은 산물이다. 신 감독은 “이제야 편히 잠들 수 있겠다”고 했다. 그런 그도 이미 산 사나이가 되어 있었다. 진한 히말라야 냄새가 스멀스멀 풍겨져 나왔다.


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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