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가뭄 휩쓴 대지 메뚜기 덮치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96호 23면

거대한 중국의 땅에 찾아들었던 각종 재해는 한재(旱災)와 수재(水災) 말고도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지진으로 벌어지는 재난인 진재(震災)도 잦았고, 우박이나 빙설이 일으키는 재난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피해의 규모와 빈도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대상은 아니다. 가뭄과 홍수로 인해 벌어지는 재난에 비해서는 함께 병렬할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한 가지는 적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가물어 텅 비어버린 대지 위에 새카만 구름처럼 다가오는 게 있었다. 그 검은 구름은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헐벗은 대지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사람의 먹을 거리를 금세 앗아간다. 따라서 시름에 겨워 눈물마저 마른 사람들에게 그런 검은 구름은 또 다른 재앙이었다.


 


춘추시대 294년간 메뚜기 재난 111회 그 검은색 구름의 정체는 바로 황충(蝗蟲)이다. 우리말로는 메뚜기다. 그 메뚜기는 날아다니기 전과 날아오를 수 있는 상태의 것을 가리키는 글자가 다르다. 앞의 것은 ?(남), 뒤의 것은 蝗(황)이다. 날아오르기 전의 어린 메뚜기는 별 볼 일 없다. 날개가 버젓이 자라 떼로 모이기 시작하는 메뚜기가 문제였다.

메뚜기 떼에 의한 재난이 빈번하게 발생해 메뚜기 신앙인 ‘황신묘’가 들어섰던 곳의 분포도다.

그 메뚜기를 蝗(황)이라는 글자로 표현한 점이 눈길을 끈다. 벌레를 가리키는 ?(충 또는 훼)에 황제를 의미하는 皇(황)을 붙였다. 벌레의 황제? 꼭 그렇게는 풀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의 한 풀이에는 ‘황제가 많은 사람을 거느리며 다니듯이 많은 떼를 이뤄 몰려다는 벌레’라는 점에서 그렇게 글자를 만들었다는 설명이 나온다. 아무튼 중국인들 마음속에는 메뚜기가 황제에 버금가는 벌레라는 인상을 줬을지 모른다.


물난리에 이어 가뭄으로 번진 난리가 거듭 닥쳤을 때는 메뚜기가 제철을 만나는 시점이다. 앞에서도 소개했듯, 중국 문명의 모태(母胎)라고 추앙을 받으면서도 시도 때도 없는 범람과 물길 변화로 많은 재앙을 불러 ‘재난과 사고의 강(江)’으로 여겨졌던 황하(黃河)가 또 메뚜기와 함께 등장한다.


메뚜기 떼는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습성이 있다. 따라서 물난리와 가뭄이 자주 겹쳐서 이어졌던 황하 중하류 지역의 백성들에게 메뚜기 떼의 번성은 또 다른 악몽이었다.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상황에 구름처럼 몰려들어 남아 있는 모든 식생을 죄다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마테오 리치라는 선교사로부터 기하학(幾何學)을 비롯한 서양의 문물을 얻어 중국에 소개함으로써 동서양 문명의 큰 접점을 이뤘던 서광계(徐光啓·1562~1633)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명나라 때의 관료이면서 학자이기도 했다. 농업의 수리(水利) 등에도 밝았던 그가 메뚜기 떼에 의한 재난, 즉 황재(蝗災)를 집계한 기록이 있다.


중국 문명의 이른 아침이랄 수 있는 춘추시대(기원전 770~기원전 476)의 예다. 서광계의 집계에 따르면 294년 동안의 춘추시대에 벌어졌던 메뚜기 떼에 의한 재난, 황재는 111회에 달했다. 3년 채 지나지 않아 한 차례씩의 혹독한 황재가 벌어졌다는 얘기다.


황하 하류 지역의 메뚜기 떼 재난이 전체 황재의 80% 정도를 차지했던 것으로 나온다. 장강(長江)은 그보다 훨씬 적다. 범람과 물길 변화, 아울러 흐름이 끊기는 단류(斷流) 현상이 잦았던 황하 유역이 10~20%의 수분 함량을 지닌 토양에서도 마구 번식하는 메뚜기 떼의 습성과 잘 맞아 떨어졌던 까닭이다.


악순환의 연속인 셈이다. 물난리와 가뭄, 황재가 이어지는 모양새다. “배부른 황제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겠느냐”는 ‘격양가(擊壤歌)’의 한 소절은 그저 전설과 상상 속의 그리움일 뿐이었다. 물난리와 가뭄, 황재는 거의 같은 대열에 설 수 있는 ‘중국 재난사의 3형제’다.


황하가 지나가는 허베이(河北), 허난(河南), 산둥(山東)의 세 지역이 메뚜기 떼의 재난이 매우 자주 닥쳤던 곳이고, 그로부터 남쪽에 있는 장쑤(江蘇)와 안후이(安徽) 및 후베이(湖北) 등도 그 범주에 빈번하게 들었다. 서북쪽에 발달한 황토 고원지대 또한 메뚜기 떼의 재난에 심심찮게 휩싸였다.


여름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오는 무렵에 메뚜기 떼가 극성을 부렸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곡식과 과일이 숙성(熟成)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일어나는 메뚜기 떼였으니 피해는 더욱 커졌을 것이다. 중국 재난사의 집대성자인 덩퉈(鄧拓)에 따르면 진시황의 진(秦)에서 한(漢)까지 메뚜기 재난은 평균 8년 8개월에 한 차례, 북송과 남송 때에는 3.5년에 한 차례, 명대와 청대에는 2.8년에 한 차례씩 벌어졌다.

중국의 대표적인 SF 영화 ‘삼체(三體)’의 최근 포스터다. 중국의 역대 3대 재난의 근원이었던 메뚜기 떼를 소재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한다.

메뚜기 떼에 대한 두려움, 민간 신앙으로 가뭄 끝에 닥치는 메뚜기 떼의 ‘약탈’은 가혹했다. 가뭄에 이어 번지는 메뚜기 떼 피해는 사람들로 하여금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도록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역시 전쟁이나 혹독한 가뭄, 거대한 물난리가 가져다주는 두려움 못지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가뭄에 이은 황재가 자주 겹쳤던 지역의 중국 사람들에게는 신앙이 하나 있다. 메뚜기 떼의 두려움에서 비롯한 민간 신앙이다. 메뚜기는 곧 신으로 변한다. 그들을 잠재울 수 있으면 그 또한 가장 믿음직한 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황신(蝗神)’이라는 말도 나온다.


글자 그대로 풀면 메뚜기(蝗) 신(神)이다. 그러나 내용은 그렇지 않다. 팔랍(八蠟)이라고 적는 전통적인 농업 신위(神位), 벌레의 왕으로서 그들의 피해를 누를 수 있다는 충왕(蟲王), 실재 인물이었으나 백성을 위해 만악(萬惡)을 제거했다는 유맹(劉猛) 장군을 신봉하는 내용이다.


셋의 종국적인 염원은 같다. 가혹한 메뚜기 떼의 피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원망(願望)이다. 그러나 성격은 조금 다르다. 앞의 농업 신인 팔랍을 향한 염원은 나중에 “피해를 줄여달라”는 직접적인 간구로 변했다고 한다. 팔랍은 당초 농업의 신에서 메뚜기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신으로 변질했다는 얘기다. 벌레의 왕, 충왕에 대한 기대도 마찬가지다. 곤충의 세계에 존재하는 상상의 신으로 하여금 메뚜기 떼가 극성을 부리지 않도록 해달라는 믿음 형태다.


그에 비해 유맹(劉猛)이라는 실재했던 장군을 향한 믿음은 조금 다르다. 앞의 둘이 메뚜기에게 관용을 베풀어 달라는 호소였다면, 뒤의 것은 살아 있을 때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했던 장군의 힘을 빌려 메뚜기를 없앤다는 설정이다. 그럼에도 이 셋은 한 묶음이다. 이들을 향한 기대와 희망이 황신(蝗神)의 민간 신앙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세 신을 모신 사당 호칭이 황신묘(蝗神廟)다. 이 황신묘의 분포도는 대개 황하 중하류 지역에 집중해 있다. 현대 들어서 중국 학계가 조사한 내용이다. 황하가 물길을 바꿨던 자리, 범람이 잦았고 그에 따라 물이 모여들었던 웅덩이가 많이 생겼던 곳, 물 흐름이 끊기면서 가뭄도 자주 찾았던 곳이 그 해당 지역이다.


그런 곳에는 예외 없이 가뭄 끝에 닥치는 메뚜기 떼의 습격 지점이었다. 메뚜기를 없애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이 뭉쳐져 있는 황신묘의 분포는 메뚜기 재난이 찾아들었던 곳과 거의 겹친다. 아울러 황신묘는 중국 화북 평원 일대에 가득하다. 가뭄과 물난리에 이어 메뚜기가 일으키는 재난이 중국인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로 자리 잡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쟁은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아프고 쓰라린 재난과 동전의 앞뒤를 이룬다. 전쟁이 벌어져 인적이 희미해진 곳은 곧 황폐해져 재난의 상황을 더욱 깊게 만들고, 먹고 살 자원이 부족해진 재해의 터전에서는 자원을 선점하기 위한 사람 사이의 전쟁이 이어지는 법이다.


따라서 중국 역사의 무대에서 전쟁과 재난은 동전의 앞과 뒤를 이루면서 이어진다. 그로써 막대한 유민(流民)이 생겨나고, 정처 없이 떠돌다가 한 곳에 정착하려는 사람과 그에 앞서 그곳에 터전을 이룬 사람들의 싸움이 또 번진다.


중국 민간에서 벌어지는 각종 싸움은 흔히 계투(械鬪)라고 적는다. 무기를 들고 벌이는 싸움이라는 뜻이다. 이는 세계의 민속학 용어로 당당하게 올라 있는 말이다. 중국 민간에서 벌어졌던 계투가 큰 전통을 이뤘다는 점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무기를 손에 들고 벌이는 싸움은 곧 끝장까지 내닫는 싸움이라는 얘기다.


먹고살 자원 선점 위한 전쟁으로 이어져힘을 겨뤄 코피 터지는 사람이 지는 쪽이라는 동네 왈패 수준의 싸움이 아니다. 누군가는 목숨을 내걸고, 때로는 피가 피를 불러 수많은 사람이 삶을 마감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마을과 마을 사이, 미리 터전을 이루고 있던 원주민과 각종 전쟁과 재난을 피해 이동했던 이주민 사이에 크고 작게, 때로는 아주 치열하게 벌어졌던 중국식 싸움의 흔적이다.


혼란의 정도가 극심한 수준에 이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중국 역사 무대에서 통일왕조의 교체는 매우 잦았다. 한 왕조가 500년 이상 권력을 장악했던 한반도의 상황과는 아주 다르다. 통일왕조가 무너지고 새 왕조가 등장하는 중국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그의 가장 큰 동인(動因)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민란(民亂)이다.


더 이상 당할 게 없고, 마지막 선택이 죽음이라면 순종적이었던 백성들은 일어서 저항을 시작한다. 이는 곧 거대한 민란으로 발전했다. 왕조의 명맥은 그로 인해 끊기는 경우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곧 다른 권력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여러 세력의 다툼으로 상황이 발전할 경우 중국인들은 그를 천하대란(天下大亂)으로 일컫는다.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다.


유광종 뉴스웍스 콘텐츠연구소장ykj3353@naver.com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