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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그림처럼 흐르는 포레의 피아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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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호 27면

백건우의 가브리엘 포레 피아노 작품집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처음 본 곳은 광화문 ‘화목순대국’이다. 5~6년 전쯤, 은행나무가 노란 이파리를 우수수 떨구던 늦가을의 토요일이었다. 중앙SUNDAY 기자 열댓 명은 밤늦게까지 이어질 마감전쟁을 앞두고 잠시 서소문을 벗어나 광화문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우연히 창가로 눈을 돌렸을 때 두 사람을 발견했다. 윤정희와 백건우(존칭 생략). 부부는 마주 앉아 조용하게 순대국을 먹고 있었다. 백건우의 연주회 소식을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그날 저녁 세종문화회관에서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이스라엘 필하모닉과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협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피아니스트는 밤늦게 끝나는 연주전쟁을 앞두고 든든한 메뉴로 체력을 다지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는 격렬하다.


두 사람은 어디든 항상 같이 다니는 걸로 유명하다. 백건우의 연주회에는 윤정희가 반드시 참석하고 윤정희가 가는 곳엔 백건우도 있다. 그렇다 해도 순댓국집에서 그들을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한국 최고의 은막의 스타는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는 우리 패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열심히 숟가락을 놀렸다. 오로지 바라보는 것은 백건우였다.


백건우는 전에 취재를 한 적도 있어서 인사를 하고 싶었다. 두 사람의 순댓국 식사 풍경은 진기한 볼거리라 사진도 찍고 싶었다. 그러나 꾹 참았다. 큰 무대를 앞둔 연주가는 무대에 오르는 순간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 일행은 아무도 그들에게 말 걸지 않고 조용하게 식당을 빠져나왔다.


최근 신문에서 두 사람을 봤다. 윤정희 데뷔 5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사진이 인상적이다. 백건우가 윤정희 뒤에 서서 빗으로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카메라를 의식하면 나오기 힘들다. 사진기자 오종찬은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하기 전부터 두 사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다 셔터를 눌렀다. 윤정희와 백건우의 동행을 상징처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인터뷰에서 둘은 말한다. “세속적인 문제들로 지지고 볶고 살기보단 마지막까지 아이처럼 근사한 꿈을 꾸면서 살다 갈래요”(윤) “가끔 당신을 보면 고무풍선 같애. 내가 손을 뻗어서 현실이라는 땅으로 끌어내려도 당신은 다시 둥실 떠오르지.”(백)


‘철없는 아내’가 떠올라 웃음이 났다. 땅을 밟고 서 있는 백건우와 공중에 떠 있는 윤정희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런데도 둘은 오랜 세월 조화로운 삶을 이어왔다. 남녀가 둘 다 이성적이면 너무 팍팍하고 둘 다 감성적이면 불안정하다. 한쪽이 좀 손해 보더라도 적당히 달라야 잘 산다.


오랜만에 백건우의 연주가 듣고 싶어졌다. 그의 음반은 많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은 세 차례로 나뉘어 나올 때마다 큰 기대와 함께 사 모았다. 쇼팽의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작품 전집도 훌륭하다.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전집은 폴란드에서 다섯 곡 전곡 실황연주를 마친 뒤 현지의 열광적 반응에 힘입어 녹음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음반들은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백건우는 나의 음악실에서 에밀 길렐스, 글렌 굴드,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같은 전설들과 경쟁해야만 한다.


자주 듣는 음반은 프랑스 작곡가들의 피아노 소품을 모은 음반 ‘달빛(Clair de Lune)’이다. 드뷔시의 달빛, 뿔랑의 녹턴,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등이 들어있다. 소박하지만 품위 있다. 이 음반을 들어보면 백건우는 프랑스 음악에 잘 맞는다는 평가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우아하면서도 어눌한 구석이 없고 깊으면서도 명석하다.


오늘은 잊고 있던 백건우의 음반을 들어보기로 한다. ‘달빛’에 가려 내 음악실에서 빛을 보지 못한 연주다. 가브리엘 포레의 피아노 소품집이다. 포레는 천재 피아니스트 까미유 생상스에게 배워 고도의 기교를 익혔지만 그의 음악은 간결하고 자연스럽다.


평생 쓴 야상곡 열셋 중 다섯 곡, 두 곡의 무언가, 즉흥곡, 뱃노래, 전주곡, 발라드가 실려 있다. 모두 아름답고 감성적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난 뒤라 그런지 한 곡씩 들을 때마다 둘의 모습이 슬라이드 쇼처럼 흐른다. 첫 곡 무언가(Romance sans paroles, op,17) 3번에서 둘은 손을 잡고 황혼의 강가를 거닌다. 4곡 즉흥곡에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까르르 넘어가는 윤정희가 보인다. 마지막 곡 발라드에서는 둘의 실루엣 뒤로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 듣고 보니 멋진 음반이다. 가슴을 뜨겁게 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연주다. 새삼스런 마음에 음반을 구석구석 살펴보니 표지 사진을 윤정희가 찍었다고 적혀있다. 둘이서 함께 만든 음반이다. 백건우가 평생의 짝에게 바치는 사랑의 고백인지도 모른다.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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