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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공동체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흔들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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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호 18면


뉴스 매체가 발달된 탓인지,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큰 사건의 보도가 없는 날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이상한 일이 벌어져서 지난 2개월 가까이 그 뉴스가 계속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였지만, 다른 나라에서 들어오는 뉴스도 그에 못지않게 마음을 산란하게 한다. 그런데 각지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뉴스를 모아 놓으면, 그 뉴스 사이에 절로 서로 연결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지난 며칠 사이의 뉴스를 봐도 그렇다. 베를린에서는 대형 트럭이 크리스마스 장터로 밀어닥쳐 12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냈다. 범인은 이슬람 국가 출신의 테러리스트라고 한다. 이 사건은 프랑스의 파리나 니스에 있었던 이슬람 테러 사건에 이어지는 일인데, 앞으로는 사람들이 축제와 같은 집단 행사에 나가기를 꺼려 할 것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뉴스는 터키의 앙카라에서 러시아 대사가 총격으로 사망하였는데, 범인은 경찰관이라고 한다. 신문에 나온 사진을 보면, 오른손을 들고 알라를 찬양하는 모습이 그보다 더 의기양양할 수가 없다. 또 하나의 테러 사건은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이슬람 모스크에 침입한 자가 총을 난사하여 여러 사람이 총상을 입은 사건이다. (이것은 흔한 이슬람 테러리즘과는 반대되는 입장의 테러리즘이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지난주에 연속하여 일어난 일들이다.

[세계 각지 뉴스들 서로 연결이 있다는 인상]
이러한 일들에 비하여, 조금 더 공식적인 뉴스라고 할 수도 있고, 사건이라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일로 프랑스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차기 대선 출마를 포기하였다는 것이 전해졌다. 대체로 중임이 전통이 되어 있는 프랑스에서 이것은 드문 일이라고 한다. 올랑드 대통령이 처음에 내세웠지만 사실은 많은 나라가 공유하는 경제 부양, 노동 조건 개선, 고용 확대 등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 데다, 대통령의 위신을 손상하게 하는 몇 가지 일들이 겹쳐 출마를 포기하게 된 것이다. 그는 더 공정한 사회정책을 내세운 사회당 소속의 대통령이었지만, 자본주의 세계 경제 속에서 사회 정책을 초지일관하여 추진할 수 없었다. 이와 비슷하게 세계적인 차원에서 중요한 사건은 말할 것도 없이 지난달에 있었던 미국의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된 것이었다. 그의 당선이 뒤집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남아 있었던 것 같은데, 며칠 전 선거대의원회(Electoral College)에서 그의 당선을 재확인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의 당선은 그가 정치계 밖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좌우를 넘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지만, 지금까지의 미국 정책을 크게 바꾸어 놓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영국 매체에 보도된 견해에 따르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공산권이 와해되고, 자유민주주의 승리가 시작된다고 생각되었던 1989년 이후의 체제가 새로운 변화의 고비에 이르렀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소개된 세계사 개관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히브리대학 교수의 견해이기도 하다.) ‘자유시장과 민주주의의 세계공동체’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흔들리게 된 것이 오늘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여러 일들이 전환의 고비에 이른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선거 슬로건 중 하나는 ‘미국이 다시 위대한 국가가 되게 하자’는 것인데, 이념적으로 미국이 내세워왔던 세계 질서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미국의 국가 이익을 그에 앞세운 것이다. 앞에 말한 베를린 크리스마스 시장 사건과 더불어 보도된 것은, 하락하고 있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국민 지지도를 그 사건이 한층 더 떨어지게 했다는 것이었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들어오는 피난민·이주민들에 대한 메르켈 총리의 개방 정책이 이러한 사건의 원인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은 이주민 정책에서 가장 포용적이었다. 근년에 독일에서 받아들인 이주민은 89만 명에 이른다. 이러한 개방정책은 독일의 노동력 수요에 관계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나치즘 이후 독일의 강화된 인도주의 때문이기도 하고, 목사의 딸이고 동독 출신인 메르켈 총리의 인도주의가 거기에 작용하였다고 할 수도 있다. 메르켈 총리는 인기에 괘념하지 않고 이주민 수용정책을 고수하여 왔다.

[유럽 극우파 ‘민족국가와 자유’ 내세워]
그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적 정치 그룹이 발흥하는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메르켈의 기독교민주당은 보수정당이지만 (그러면서도 독일의 대부분의 정당이 그러하듯이, 복지 정책 등 사회 정책을 포용하는 정당이다) 유럽연합(EU)에 반대하고 더욱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독일대안당(AfD)과 같은 정당의 지지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에서 민족주의 정당으로 유명한 것은 국민전선(Front National)이다. 민족 자주성을 옹호하겠다는 것을 가장 분명하게 선포한 것은 유럽연합으로부터의 영국의 탈퇴, 소위 브렉시트를 결정한 국민투표였다. 그렇기는 하나 이러한 정당들이 반드시 완전히 폐쇄적으로 국가 간의 경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민족주의 정당들은 서부 유럽뿐만 아니라 동유럽에서도 커져가고 있는데, 이들 정당들은 서로 연계관계를 굳혀가고 있다. ‘민족 국가와 자유의 유럽 운동(Movement for a Europe of Nations and Freedom)’은 민족 국가 옹호에 나선 여러 나라의 정당을 연결하는 연합체인데, 그 이름은 이들이 생각하고 있는 유럽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유럽연합 체제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통합과 개별 국가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여론과 정치 단체들의 대두는 국가와 정치의 문제를 새롭게 생각하게 한다. 어떤 정치 체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체제에 대한 강한 소속감이 있어야 한다. 국가의 경우 그것은 국가의식 또는 민족의식이다. 유럽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유럽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일정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또 유럽인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에 대한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의식이란 단순히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 의식이고 윤리적 책임의 의식이다. 그러면 그리스가 큰 재정문제에 부닥쳤을 때와 같이 한 쪽에 문제가 있을 때, 다른 쪽이 이것을 구출해내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전쟁으로 점철되었던 유럽에서 유럽연합의 성립은 중요한 발전을 의미했고 다른 지역에서도 좋은 모범적 사례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나은 인간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모든 인간이 하나의 평화 공동체를 이루어 낼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유럽연합에 대한 회의는 늘어 가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른 여러 세계적 현상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자유와 세계화를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하여 대중을 희생시키는 사기극’이라고 하는 부정적인 견해도 등장하였다. 그리고 유럽연합의 체제도 여기에 포함된다. 사기극이라는 것까지는 몰라도, 여기의 판단은 체제가 윤리적 바탕을 결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어찌되었든, 유럽연합에 대한 회의와 민족주의의 재등장은, 유럽연합이 국가가 수행할 수 있는 만큼의 책임을 수행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국가 정당성의 토대는 공공 윤리의 정당성]
잠깐 샛길로 드는 일이지만, 국가를 논하는 정치 이론에 더러 등장하는 말에 베네딕트 앤더슨이 만들어낸 ‘상상된 공동체’라는 말이 있다. 앤더슨은 여러 가지 역사적인 이유로 하여, 18세기 이후에야 제대로 국가가 성립하고 국가·민족 의식이 생겼다고 한다. 그것이 ‘상상된’ 것이라는 말은 국가를 뒷받침하는 것이 반드시 자연스러운 의식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비슷하게 유럽연합이 실체가 되려면, 국가 의식과 같은 유럽 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평자는, 최근의 반(反) 유럽연합 정서와 관련하여 민족 의식의 저쪽에 있는 프랑스의 지방 의식을 지적하고 있다. 가령 보르도나 툴루스로부터 멀지 않은 시골에 가면, 그러한 도시들을 수상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으로 보고, 파리와 같은 도시는 외국의 수도쯤이나 되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렇기는 하나 현 시점에서 유럽에 있어서의 국가 의식, 민족 의식은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최근 민족주의의 부활, 특히 프랑스에서의 그 부활이 말하여 주는 것도 그것이다. 다만 유럽연합에는 내실있는 유럽 의식이 미발달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대체로 민족주의의 대두는 생활의 관점에서의 불이익에 대한 보상으로 주장되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말한 바, ‘특권층을 위한 사기극’이라는 판단은 이 점을 특히 생각하게 한다.


어떤 경우나 새로운 공동체 의식의 발달이 쉬운 일일 수는 없다. 이것이 성립하는 데에는 이해관계가 깊이 작용한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의 발달도 그것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국가의 경우를 볼 때, 국가 의식은 본래의 공동체 의식의 확대를 요구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직접적인 감정을 넘어 추상적인 규범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규범은 물론 공적 행동 그리고 더 나아가 윤리적 규범에 따른 행동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는 흔히 이러한 윤리 규범을 권력과 법으로 부과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독재체제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20세기 인류의 경험의 하나는 그러한 윤리적 규범을 표방하는 권력체제는 결국 인간적 사회를 건설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또 추가하여 생각할 것은 그러한 규범체계는 극단적으로 단순화되는 경우가 많고, 그때 극단적인 비인간화가 수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의 극단주의는 윤리와는 관계 없이 이익으로만 하나가 되는 집단이나 공동체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국가는 여러 복합적 요소로 이루어지는 집단체제이다. 그것은 권력의 체제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적절한 수준에서 국민의 삶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국가의 정당성은 그 공공 윤리의 정당성에서 온다. 현실 사회에서 그것이 과연 중요할까 하고 회의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약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국가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박근혜 대통령에 관계하여 일어난 일들은 이 근본 토대에 관계되는 사건이다. 최근에는 ‘이게 나라냐’ 하는 농담 비슷한 말이 나오는 것을 듣는다. 그것은 농담이면서도 국가의 근본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게 된 것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속 국가들의 국민 이익이 확보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거기에 작용하는 것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를 넘어 유럽 전체를 수용할 수 있는 공공 윤리 의식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윤리에도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의 윤리는 부패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높이 승화할 수 있는 윤리가 발달되지 못한 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더 진전하여 더욱 보편적인 인간 이념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유럽연합 회의주의는 더욱 아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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