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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움과 결단력 갖춘「보통사람」|노태우 민정 대통령후보 그는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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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정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노태우씨-그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의 지인들은 이 물음에 대체로 『그는 평범한 보통사람이다』고 답한다. 그리고 덧붙여 『참을성이 많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끝까지 갈 경청하는 사람』이란 말을 하는게 보통이다. 그의 과거를 말하는 사람들은 특출했다든가, 강한 개성을 가졌다든가 하는 얘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55세가 된 지금까지 대체로 「모범생적 선도집단」에 속하면서 합리적이고, 온건한, 참을성 있는 인물이란 인상을 주어왔던 것 같다.
그런 그의 성격은 집권당대표위원 재임2년중에도 대부분 그대로 나타났다고 할수 있다. 많이 참고 많이 견디면서 자기주장이 있더라도 시끄러워지면 굳이 밀고 나가지는 않는 스타일을 보였다.
따라서 대통령후보로서 그 자신이 이제 선도역을 해야할 시점에서 그의 경륜·정견·지도이념·자질, 그리고 능력은 엄격히 말해 여태껏 거의 시험받지 못한 미지의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고 앞으로 그 스스로 개척하고 보여야할 최대과제인 것 같다.
노후보는 1932년12월4일(음력) 경북경산군 공산면 신룡동(81년 대구시동구로 편입)의 용지라는 마을에서 당시 면 유지였던 면서기 병수씨(작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모친 김태향씨(78)가 시집와서 인근 파계사에 불공을 드린지 8년만에 낳은 첫 아기였고 그 아래로 두 남동생이 태어 났으나 막내는 두 살 때 죽었다.
팔공산지맥이 반달처럼 휘어달리는 서쪽 끝 산자락에 위치한 용지는 앞뒤로 험산이 중첩한 산골마을로 지금도 대구에 편입되긴 했어도 외딴 마을임엔 변함이 없다. 당시 중농가세의 집안에서 신식교육을 받아「개명신사」로 통했던 부친은 너덧살의 그를 무릎에 앉히고 마을 유일의 유성기를 종종 듣곤 했다고 한다. 『그럴 때면 으례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노래를 같이 들었다』고 노후보는 행복했던 유년기를 회상했다.
비록 그 「즐거웠던 시절」이 아버지의 교통사고에 의한 갑작스런 별세로 6세에 마감됐지만 선친의 유성기는 그에게 음악에 일찍 눈뜨게 했던 것 같다.
그의 유소년시절의 친구들 『휘파람과 노래를 썩 잘 불렀다』고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나 경북중(구제)시절 학예회에서 작사·작곡한 노래를 불렀고 연대장·여단장·사단장시절 꼭 부대가를 작사·작곡했다든가 지금도 노래를 수준급으로 부른다는 걸 보면 그렇다.
한학을 배운 조부와 30대의 편모가 10여마지기의 논밭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어려운 가세에서 훈도를 받은 탓인지 노후보는 그때까지 내성적이고 온순한 아이로 자라 다른 아이들과의 다툼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8세때부터 6년간 험한산골길 시오리를 조석으로 「뛰다시피」해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동창들은 『늑대가 나오는 산골길 시오리를 날마다 달리다시피 학교에 오간 끈기가 그 특유의 인내심을 길러준 바탕이자 꾸준히 자기향상을 해낸 원동력이 아니었겠느냐』고 지적한다.
그는 『자꾸 참다보니 참는게 제2의 천성이 됐다』며 『강한 주장, 서슴 없는 주장을 용기라고 하지만 참기 힘든 것을 참는 것도 이에 못지 않은 용기』라고 지론을 펼만큼 참는데는 이골이 났다는 평을 듣는다.
공산국교의 은사, 진우섭옹(74)은 『총명했던 건 사실이나 기본적으로 평범한 아이였다』 고 기억하면서 『성적은 3등쯤 했으나 본인이 원한 경북중에는 어려워 대구공업중(대구공고전신)에 원서를 써주었다』고 회고했다.
중학진학은 삼촌 병상씨(66)의 도움으로 가능했고 대구 칠성동의 삼촌집에서 중학시절을 보냈다. 병상씨는 조카가 중학시절 독서를 좋아했다며 삼국지를 읽더니 『유비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한 것이 기억난다』고 회상했다.
친지들과 동창들은 『뜻을 세우면 끝장을 내는 성격이었다』고 기억하는데 구제 경북중 4년에 편입한 것도 그런 집념의 결실이었던 것 같다. 공업중 3년과 경북중 3년을 같이 다녔던 단짝 한종렬경북대교수는 『전기반 3학년 때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 경북중 편입시험을 보자고 뜻을 모아 공부했는테 보통 볼 수 있는 모범적이고 온순한 학생이어서 별명도 없었다』고 했다.
경북중 은사인 이길우경북녀고교장은 4학년 학적부에 『온순·충실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책임감이 있다』고 평가해 놓았다.
편입 첫해인 4학년 석차가 2백24명중 1백2등이었는데 5학년때는 2백18명중 63등으로 뛴 걸보면 「꾸준한 노력가형」임을 알수 있게 된다.
『육사생도중에서도 머리가 좋아 성적이 우수하고 말도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멀리보니 우직하게 땀흘리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 되더라』는 그 자신의 말처럼 그는 번쩍이는 기지나 재사형과는 거리가 멀고 꾸준히 집념을 갖고 뭔가를 이뤄내는 끈기형에 가까운 것 같다.
『농촌의 순박한 사람들의 정형을 보는 것처럼 원체 얌전하고 기가 보드라와 야단치기도 힘든 학생이었다』(이길우교장), 『키도 작고 그렇게 평범한 학생이 어떻게 집권당대표위원까지 됐을까 놀랐으며, 동기생들이 모여 그의 특징이 뭐였던가 하고 기억을 짜내 봤으나 노래와 휘파람을 기차게 불었다는 것 밖에는 별다른게 없었다』(유수호변호사)는 등의 증언은 청소년시절 그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의사가 되기를 꿈꾸던 소년은 6·25를 만나 오늘의 그를 있게한 인생전변의 길로 들어선다.
18세때인 중학6학년때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자원, 현병학교기간요원(9백명중 1등을 해서 남게됨)으로 복무중 육사정규생모집공고를 보고 몇몇 친구들과 의논, 육사에 응시했다. 그 자신은 육사에 가게된 동기에 대해 『그 때 불타오르는 향학열을 어디가서 채울 수가 없었는데 진해는 안전한 곳이니까 배울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 놓았다.
52년1월 육사에 입교한 그는 키가 15cm쯤 더 커 키작다는 소리는 안듣게 된 외형적 변모외에 전두환대통령을 동기로 만나 그 이후의 「운명적 동반관계」의 단서를 연다.
노후보는 군시절 소령때부터 전대통령등의 선두그룹에 이어 2차로 진급했고 참모총장수석보좌관·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보안사령관등의 직을 전대통령으로부터「인계」받는 기연을 맺었으며, 이같은 양자간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12·12사태로 이어져 오늘의 후보지명상황으로까지 발전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육사시절은 「얌전한 소년」노태우를 장차 크게 바꾸는 운명의 맹아를 배태한 기간이었다.
육사시절 그는 1백m들 11초대로 띈 준족의 청년이 됐으며 럭비부에서 남다른 투지와 극기력을 보였다. 그런 한편으로 홍사용의 감상적인 시와 「헤르만·헤세」의 시에 심취했다. 그중 몇편은 지금도 줄줄 욀 정도다. 어린시절의 음악적 소양이 청년기에 와서 이런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운동에는 거의 만능의 재질을 보여 정구·수영등에는 지금도 남다른 솜씨를 보이고 있다.
그는 그때도 여전히 동기생들의 구심적 존재는 아니었지만 4학년 때 구대장생도를 하는등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해 소년시절 보다는 뚜렷한 존재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성격도 그전보다는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다고 한다.
55년8월 상위권 성적으로 육사를 졸업한 그가 62년봄 11기이후의 육사출신 동창회인 「북극성회」회장에 선임된 것만 봐도 끊임 없이 자기발전에 노력해 동료들중에서도 눈에 띄는 존새로 부각했음을 볼 수 있다.
59년5월31일 경북중 1년후배이자 육사동기로 막역한 친구인 김복동씨(예비역 육군중장) 의 누이 옥숙씨(52·경북녀고졸)와 연애끝에 혼인했으며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73년 윤필용장군사건 때 연루혐의를 받고 한 때 곤경에 처하기도 했으나 군생활은 「예술의 극치」라는 그의 말처럼 그의 기량이 발휘되고 평가받는 보람의 무대였다.
그는 다양한 구성원을 하나로 통합, 조화해 생명력 있는 집단으로 만들기 위해 「명령이 아닌 대화」라는 지휘방침으로 소대장때부터 우수부대를 양산해 냈다.
그는 『인간관계는 법규와 규율이 아닌 오묘한 예술이라는 생각으로 살아 왔다』며 『나는 일을 함에 조직을 매우 중시하며 한 사람의 천재보다는 두 사람의 범인이 낫다는 생각에서 모두의 의견을 듣고 거기서 나온 결론을 토대로 스스로 해 나가도록 한다』고 말해 조직의 조화와 인화, 개인의 창의성과 자발성의 도모에 역점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는 지휘관시절 「자기사람」을 전속 때 데리고 다니지도 않았고 또 만들지도 않았으며 정치인이 된 이후에도 노신영 전 총리가 외무장관시절 천거한 이병기보좌역 외에는 늘 조직내의 인물을 참모로 활용해 오고 있어 인맥을 독자적으로 구축하지 않았다.
그는 5·16직후 대위시절부터 정보부 파견근무등으로 정치와 관련 있는 경험을 쌓으면서 엘리트코스를 달려 왔지만 74년1월 대망의 장군으로 승진했을 때는 이미 군에서도 손꼽히는엘리트 그룹에 들어가 있었다.
78년 전대통령의 뒤를 이어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를 맡은 것만 보아도 이런점은 잘 알수 있다.
장군 노태우를 정치로 밀어 넣는 결정적인 사건은 두말 할 것도 없이 12·12사태다. 휘하 사단병력을 서울로 이끌어 전두환보안사령관(당시)과 함께 군주도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힘을 사용할 줄 아는 군인이며 중대한 국면에서는 결단을 내리는 인물』이라는 한 민정당의원의 지적은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수경사·보안사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예편, 81년7월 외교·안보담당의 제2정무장관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열굴을 내민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휘말려 들어 그렇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평소 정치적 성향은 다소 있었지만 정치적 입신에 관심을 가질 정도는 아니었다』는 한 친지의 말도 있지만 『유순함속에 무서운 발톱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수가 있다』는 한 육사후배 정치인의 평가는 그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대체로 부드럽다는 인상을 주위에 주어 왔다. 정무·체육·내무장관과 올림픽조직위원장등 요직을 거치면서 내외에 비친 얼굴도 「온화하고 합리적이며 끝까지 경청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온건함속에 숨겨진 결단력이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 일으키고 있으며, 그것은 오늘의 험난한 정국에서 그가 그럴 때가 오면 온건의 인상과는 다른 결단을 내릴지도 모른다는 추측과 관련해 주목되는 대목이다.
2·12총선직후 민정당대표위원으로 비로소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도 그는 여권내의 온건론대표라는 위치에 섰다.
그의 온건론은 국민을 의식하는 당대표라는 입장탓이기도 했지만 그의 개성과도 관련된 것임은 물론이다.
그는 한 때 견제를 받기도 하고 간혹 언짢은 일도 있었지만 눈에 띄게 반격이나「저항」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인내와 자기발전의 과정끝에 마침내 집권당 대통령후보가 됐지만 아직 그의 정치철학 또는 정치비전이 뭔지는 지나칠 정도의 자기보호적 처신으로 인해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의 언행이나 경력·입장등을 종합해 볼 때 그는 현체제적 보수주의자로서 점진적 개량주의자·점진적 민주화논자라고 일단 생각할 수 있다.
『정직하고 강한 정부를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민주주의는 서로가 끈질기게 이해시키고 대화하는 것』이라는 등의 발언과 평소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진보세력을 여야가 흡수하거나 그들에게도 제도권내에 존립할 여지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산업화에 따른 근로자문제·과격경향등에 대한 그 나름의 처방이다.
그는 경제에 대해서도 무리한 조처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 실명제파동 때 내무장관으로서 이의 완화에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골고루 잘 사는 방법을 서로 의논하는게 민주주의가 아니냐』『정치인은 분배를 어떻게 골고루 잘해 소외된 계층을 어루만지느냐는 책무를 가졌다』는 그의 말에서 느껴지듯 그의 경제·사회 문제에 대한 견해는 아직 체계적으로 제시된 바 없지만 제5공화국의 기조와 크게 다른 점은 없지 않을까 짐작된다.
그는 대표위원으로서 현대사의 재조명, 젊은 층에 대한 관심, 통일에 대한 포부등 다방면에 걸쳐 언급해 왔지만 아직도 그다운 체춰가 물씬 풍기지는 못하고 있다.
이제부터 스스로의 철학과 노선과 비전을 만들고 제시하고 지지기반을 넓혀 나가는 것이 그의 책무일 것이다.

<이수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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