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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겨울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

중앙일보

입력

흥남 철수작전은 6·25전쟁을 치르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받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1950년 12월, 미 해병대의 투혼으로 장진호 철수 작전은 유종의 미를 거두었지만 유엔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이 입소문을 타고 전해지자 주변의 수많은 피난민들이 흥남일대로 몰려들었다. 흥남부두는 작전 중인 군인뿐만 아니라 공산치하에서 탈출을 원하는 민간인 등 대략 20만 명이 북새통을 이루며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러한 열악한 여건 하에서 유엔군은 흥남 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실시해 소중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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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함포지원 하에 단계적으로 철수
최초에 미 제10군단은 함흥-원산 일대에 강력한 거점인 해안교두보를 확보할 계획이었으나 중공군의 공세가 예상외로 강력하자 흥남항에서 철수하기로 변경했다. 장진호 부근에서 미 해병사단의 혈투에도 불구하고 장진호 북방에 있던 유엔군과 피난민들은 퇴로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유엔군은 흥남을 중심으로 3개의 작전통제선을 설정하고, 해상에 항공모함 7척,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로켓포함 3척 등을 배치하여 철수작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미 제10군단이 철수시켜야 할 물동량은 병력 105,000명, 차량 18,422대, 각종 전투물자 약 35만 톤이었다. 미 해군은 긴급으로 125척의 수송선박을 동원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철수계획에 의거 한국군 제3사단, 장진호 전투에서 피해가 심각했던 미 해병대 제1사단 순으로 철수했다. 12월 21일까지 미 제10군단의 주력부대가 출항한 뒤 미 제3사단이 제3통제선을 확보한 가운데 피난민 후송작전이 전개되었다.

흥남 철수작전 [그림 군사편찬연구소 DB]

흥남 철수작전 작전도 [그림 군사편찬연구소 DB]

군수품을 다 버리고 피난민을 태워라!

함경남·북도 전 지역에서 끊임없이 몰려드는 인파로 흥남부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미 제10군단장 아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은 최초 군·경 가족과 일부 피난민만 철수 대상에 고려했으나 기존 결정을 바꿔 피난민을 흥남부두 서쪽의 서호진에 집결시켜 선편이 닿는 대로 후송시키기로 했다. 문제는 늘어나는 피난민에 비해 수송선박이 턱없이 부족한데 있었다.
아몬드 군단장은 후송하기로 계획된 군수품을 적재하여 출항할 것인지 아니면 많은 피난민을 태울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미 제10군단장의 통역 겸 고문인 현봉학 박사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피난민 10만여 명을 철수시킬 수 있었다. 김백일 장군은 “만약 미군이 피난민을 두고 간다면, 국군은 피난민과 함께 중공군과 싸우며 육로로 후퇴하겠다!” 라며 완강하게 승선을 거부하기도 했다. 결국 김백일 장군의 인간적인 호소가 아몬드 장군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미군은 군 수송선에 적재된 물자와 장비를 하역하고 대신 피난민을 태우기로 결정했다. 현봉학 박사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의 쉰들러로 불리고 있으며 정부로부터 보국훈장을 수여받았다.

흥남부두로 몰려든 피난민들 [사진 군사편찬연구소 DB]

흥남부두로 몰려든 피난민들 [사진 군사편찬연구소 DB]

기네스북에 오른 기적의 배 빅토리호!

12월 23일을 기해 피난민 후송작전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미 제10군단 참모부장 포니(Edward H. Forney) 대령은 LST 2척과 빅토리호 등 상선 3척을 지휘해 5만여 명의 피난민을 안전지대로 후송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6천 톤급 ‘메러디스 빅토리(Meredith Victory)’호에서 탄생했다. 항구로 몰려드는 피난민들과 병아리처럼 겁에 질린 아이들을 쌍안경으로 바라본 빅토리호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 선장은 화물 대신 최대한의 인원을 태우기로 결심했다. 정원 60명의 빅토리호는 선내 화물은 모두 버리고 1만 4천 명의 피난민을 태울 수 있었다. 배에 탄 피난민들은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선박 구석구석에 서로 웅크린 몸을 의지하며 버텼고 선원들은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주기도 했다. 빅토리호는 3일간의 항해 끝에 부산을 거쳐 25일 무사히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항해 도중에 선상에서 5명의 신생아가 탄생해 또 하나의 ‘크리스마스의 기적’도 있었다.
한국 정부는 1955년 라루 선장을 찾아가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고, 승무원 전원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며 그들의 헌신에 감사를 표했다. 빅토리호는 1966년에 베트남전에도 참전한 후 1971년 3월 퇴역했지만, 이 배는 최악의 조건하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기적의 배(Ship of Miracle)’로 불리며, 2004년에는 세계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성 바오로 수도원의 수사(Brother Marinus)가 된 라루 선장의 신앙고백이 지금도 내 마음속에 울린다. “나는 어떻게 그 적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끝없는 위험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 무렵, 황량한 한국 바다 고난의 항해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이 내 뱃전을 인도하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장삼열 한국국방연구원 획득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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