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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정부 개입 중단하고 ‘출구시장’부터 열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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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 제 510 호

한국의 창업 생태계가 침몰 위기다. 레저 관련 사업을 준비하는 이준혁(34)씨는 “창업하기 위해 6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는데 또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할 판”이라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창조경제는 어차피 한국 경제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성장의 한계를 돌파하려면 창업가들의 혁신 에너지가 필요하다. 창조경제의 리모델링을 위해서는 우선 글로벌 표준에 맞춰야 한다.

창조경제 다시 꽃피우려면

일러스트=강일구 ilgook@hanmail.net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 관료들은 창조경제를 전통 산업과 최신 기술을 결합한 ‘스마트 뉴딜(Smart New Deal)’ 정책이라고 정의했다. 이(異)산업 간 융합을 통해 1933년 미국의 뉴딜 정책과 같은 낙수효과를 일으키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실천 방식도 미래창조과학부가 주관해 정책 기조를 세우고 기업이 후원해 창업을 활성화하는 톱다운 방식을 택했다. 과거 개발연대의 성장 경로를 그대로 따른 셈이다. 꼭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현대적 스타트업 육성 전략과는 적지 않은 거리가 있다.

찰스 랜드리 코메디아 대표는 물적 기반을 갖춘 도시가 예술·문화를 육성해 사람과 자본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창조도시론’을 주장했다. 미국의 뉴욕이나 실리콘밸리가 있는 새너제이, 독일 베를린 등이 대표적인 창조도시다. 이에 비해 획일화된 사고를 강요하는 북한 같은 독재국가나 쿠바 등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창조가 발현되기 어렵다. 그런데 한국은 아래에서 위로 퍼지는 분수형이 아닌 낙수형 모델을 택했다. 창업 여건이 워낙 취약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빨리빨리’ 성과를 내고 싶었던 정책 조급증도 한몫했다.

아래서 위로 퍼지는 분수형 창업모델 필요

전문가들은 해법으로 ‘출구(Exit)시장 활성화’를 꼽는다. 창업도 궁극적으로는 이윤을 창출하는 일이다. 창업 이후 계속 직접 경영할지, 매각해 수익을 거둘지, 상장을 통해 큰 성공을 노려볼지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출구시장이 열려야 정부가 개입하지 않아도 자율적으로 돌아가는 창업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 네이버 관계자는 “국내에서는 대기업의 스타트업 인수를 경제력 집중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측면이 강해 액셀러레이팅(가속화) 단계에서 사업을 포기하거나 미국으로 건너가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전했다. 돈이 안 되니 자연히 벤처캐피털도 활성화되지 않는다.

국내 상황에 한계가 있다면 정부는 이스라엘처럼 스타트업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은 인구 770만 명의 작은 나라지만 나스닥에 90여 개의 기업을 상장시켰고, 2014년 스타트업 인수합병(M&A) 규모만도 150억 달러(약 18조원)에 달한다. 한류 열풍이 불고 있는 중국·홍콩·인도네시아 등에 한국 스타트업이 진출하는 방안을 고려할 만하다. 창업자의 실패에 대비한 펀드를 조성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원재 요즈마펀드 한국법인장은 “이스라엘은 실패를 경험하면 다시 실패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측면에서 재창업 시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한다”고 조언했다.

정치권과 정부의 지나친 개입도 삼가야 한다. 창조도시론의 관점으로 보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창조경제가 시작된 때와 장소는 2006년의 서울시다. 오세훈 당시 시장은 ‘디자인 서울’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 이미지 개선에 나섰다. 그러나 시정 홍보에 지나치게 활용한 나머지 “실체가 없다”는 정치적 비난과 함께 사그라졌다.

주입식 교육으론 4차 산업혁명 대응 못해

0503정부의 창조경제 역시 성과를 과잉 홍보하고 애꿎은 창업자들을 의전에 동원시키는 바람에 정책의 신뢰와 이미지만 깎아먹었다. 한 민간 창업지원센터 관계자는 “어느 창조경제 페스티벌에 ‘대통령이 참석하니 센터별로 무조건 100명씩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발표회·전시회에 불려 다니느라 시간에 쫓겨 제 발로 센터에서 나간 사례도 있을 정도”라고 전했다. 혁신센터가 지금까지 1523개(11월 말 기준) 기업의 창업을 돕고 2만1415건의 멘토링·컨설팅을 펼쳤음에도 올바른 성과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금 지원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교육 개혁이 시급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사회는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가는데 정부는 옛날처럼 대기업에 하나씩 떠맡겨 센터를 만들고 창조경제라고 우긴다”며 정부는 교육 개혁과 인프라 조성에만 집중하라고 주문했다. 그는 “주입·암기식 교육으로는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할 수 없다”며 “미국의 프로젝트 수업처럼 서로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모으는 교육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 개혁과 함께 소통과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강창욱 한양대 산업경영공학과 교수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반박하고 설득하는 능력을 어릴때부터 배양하는 것이 창조경제의 시작”이라고 했다. 창조경제는 산업화 시대와는 달리 사람 중심의 패러다임인 만큼 우수하고 창의적인 인재를 키우고 활용하는 개방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희준 연세대 정보산업공학과 교수는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수직적 의사결정체계를 수평적으로 바꿔야 창조경제가 성공한다”며 “정부와 기업에서 직언할 수 있는 시스템부터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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