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그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거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10호 34면

나잇값


국어 대사전 [명사] 나이에 어울리는 말과 행동을 낮잡아 이르는 말.


그 여자의 사전 평생 정답을 찾기 힘든 것. 젊었을 땐 늙은 마음으로, 늙어선 다시 철없어진 마음으로 사는 자세 때문에 아마도 영원히 제대로 한번 해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


무려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단 2분 만에 매진이 됐다는 록밴드 콜드플레이의 내한 공연 티켓 구매에 성공했다. 그것도 무려 입장순서 70번대의 핫 티켓으로! 이런 종류의 티켓 예매 경험이 꽤 있는 나로서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예매 시간이 되자마자 일 초 만에 접속 과부하로 다운되어 있던 사이트가 갑자기 모세가 홍해를 가를 때처럼 저절로 되살아나 열리더니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스르륵 결제까지 완료됐다. 같은 시간 PC방에서 같은 목적으로 그곳에 모인 익명의 사람들과 함께 열리지 않는 화면만 바라보던 아들은 일생 일대의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엄마, 정말 대단해”라는 칭찬을 날려줬다. 역시 구매에 실패한 회사의 젊은 동료들에게는 ‘신의 손’으로 불리게 됐다.


아무 생각없이 예매 전쟁에서 쾌승을 따낸 뒤 한숨을 돌리자, 몰려드는 걱정. 그러니까 예매는 40대 때 했지만 콘서트가 열리는 내년이면 내 나이 오십이다. 몇 년 전 그린 데이의 공연을 따라가 젊은 아이들이랑 펄쩍펄쩍 뛰다가 힘들어서 실신할 뻔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과연 내 체력이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가사는 다 외울 수 있을까. 그러다가 ‘나잇값’‘주책’이라는 단어가 오락가락하자 뭔가 잘못한 건 아닐까 싶어 주눅이 들기 시작한다. 50대에 록 콘서트 스탠딩 관객이라니. 누구든 그런 그림을 상상으로 떠올려도 거기엔 땀에 흠뻑 젖은 젊은 남녀가 딱 어울리는데 말이다.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대부분은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려고 해도 힘들 텐데요. 젊은 마음을 먹고 사는 건 좋은 일이에요. 남의 눈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하겠지. 하지만 마음이 젊다고 해서 몸도 젊은 건 아니다. 그리고 나도 겉으로는 남들에게 같은 말을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잇값’의 잣대로 남을 바라보고 있다. 중년의 여성이 푸석푸석한 머릿결로 긴 생머리를 하고 있거나, 후드 티를 입고 있거나 스키니 진이나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을 땐 뭔가 어색해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머리가 벗겨지고 배 나온 아저씨의 주름 가득한 얼굴이 페이스북의 프로필 사진으로 등장할 때도 마찬가지다. ‘숫자에 불과한 나이’를 뛰어넘는 용기와 ‘주책’의 경계는 참 아슬아슬하게 얇아보인다.


그런 마음으로 나이 들면서 내 몸과 마음의 금기를 하나씩 늘려왔다. 20대에 피아노를 치는 일을 포기했고 30대 중반 넘어서 립스틱을 사 모으지 않기 시작했다. 40대 들어서는 헤어스타일을 커트로 고정했고 청바지를 더 이상 입지 않고 셀카를 남에게 공개하지 않으며 더 이상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50대를 눈앞에 둔 지금, 그렇게 ‘나잇값’에 맞게 금지사항만 늘려왔던 건 어리석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하나씩 나잇값을 더하다 보면 나는 하나씩 할 일이 없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꼭 록 콘서트를 가고 싶어 내가 변덕을 부리는 건 아니다. 시대는 달라졌고 우리는 이전 세대들 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야 하고 의학 기술은 발달했다. 이미 눈 밑 주름과 팔자주름 칙칙한 얼굴색 따위는 주사만 꾸준히 맞아 준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충분히 느끼고 있다. 나날이 젊어지는 듯한 50대 60대 유명인사들의 얼굴들을 보면 “그래도 무릎은 나이를 못 속인다”“목 주름은 어쩌고”하는 댓글들도 몇 년 뒤에는 아예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얼굴을 보다 보면 꼭 그렇게 돈을 들이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나는 늙어가는 외모를 막으려 단 한 번이라도 성의있는 노력을 해봤나 꼭 자문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주름이 아름다워 보인다는 건 누구에게나 확률이 높지 않은 일이고 그것을 내가 바라보는 거울 속에서 느끼기란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거울 보며 자책만 할 게 아니다. 이미 관리에 실패해버린 주름은 할 수 없이 나잇값에 맞춰 늘려가더라도, 대신 마음이라도 늙지 않기 위해서 가능한 영역에서 주책의 경계를 넘어 보는 거다. 내년 콘서트에서 팡팡 뛰는 50대 스탠딩 관객이 되기 위해서 체력 훈련을 시작해야겠다. 흰 머리는 모자로 가리고 뛰자. 신나게 떼창하기 위해 가사도 열심히 외우자. 중년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될 테니. ●


이윤정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