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제 한계 메운 촛불, 정치권이 수용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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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 시대 할 말은 한다

‘저항’의 뜻은 사전에 ‘어떤 힘이나 조건에 굽히지 아니하고 거역하거나 버팀’으로 적혀 있다. 뜻풀이에서 볼 수 있듯 강한 정서를 담고 있다. 하지만 지난 두 달간 대한민국에서 저항이 품은 의미는 평소와 달랐다.

촛불 이전부터 싹튼 저항 감수성
불만 표출 넘어 원하는 성과 얻어
일부 직접 민주주의 욕구도 분출

본지는 다음소프트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렌드 분석틀인 ‘소셜메트릭스’를 통해 11월 13일부터 한 달간 ‘저항’이라는 단어와 함께 언급되거나 유추되는, 감정과 관련된 단어를 조사했다.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 5개는 좋은·귀엽다·평화·기대되다·갈등이었다. 부정적인 단어는 갈등이 유일했다.

10월 29일부터 7차례에 걸쳐 759만 명(전국, 주최 측 집계 기준)을 모은 촛불집회는 긍정적 의미의 ‘저항 감수성’을 전파하는 장이었다. 광장에 모인 시민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저항의 싹에는 뿌리가 있다. 1990년대에 등장한 ‘신세대’들이 40대가 된 게 그중 하나다. 과거 세대와 달리 주관이 분명했던 이들이 기성세대가 되면서 “부당한 일에 참지 않는다”는 유전자(DNA)가 널리 퍼졌다고 사회학자들은 분석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2010년 무상급식 논쟁부터였다. 그간 국가를 위한 의무만 생각해왔던 국민이 응당 받아야 할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부당한 행위에 참지 않는 저항 감수성이 자라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촛불집회는 권리의식을 공유하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불만을 표현하는 걸 넘어 원하는 걸 분명하게 말했고, 결국 이뤄냈다. 이 경험을 수백만 명의 시민이 공유했다”고 말했다.

‘온라인 시민의회’ 같은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도 분출됐다. 정치스타트업 ‘와글’이 촛불집회 민의를 대변할 시민대표를 선출한다며 방송인 김제동씨 등 1141명을 후보자로 내세웠다. 반대론에 막혔지만 ‘사이다 시대’의 참여형 국민은 대의제 실패를 두고 보지만은 않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저항 감수성은 역사에 자주 등장한다. 1968년 미국에서의 베트남전 반대 운동 때 시민들이 대규모 거리 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물이 프라이머리라는 민주적 대통령 선출 방식이다. 87년 6월 항쟁은 한국인에게 대통령 직선제라는 성과를 안겼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미국에선 보수와 진보로 정치가 극명하게 갈렸고, 한국에선 야권 분열로 직선제 혜택을 여권이 차지했다. 김민전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시민의 저항권은 대의민주주의제로 이룰 수 없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만 반대 세력의 반발로 반동이 생기는 부작용도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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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부작용을 막으려면 촛불로 나타난 민의를 제도정치의 틀 안에 안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복원시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제도정치를 촛불 에너지와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방법에 대한 논의를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호기 교수는 “국가를 사실상 ‘리빌딩(재건축)’하라는 게 시민의 요구다. 이를 해결할 주체는 정치권이다. 광장에서 분출된 요구를 반영하는 시스템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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