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7인의 작가전] 인 더 룸 #3

중앙일보

입력

언니는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욕실 문을 닫았다. 언니 방의 희미한 불빛마저 사라지자 거실에 불이 꺼져있다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혈관 안에는 미친개가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황급히 방으로 뛰어들어가 침대에 와락 엎어졌다. 나는 잘 마른 수건을 들고 있었을 뿐이야. 왜 나를 쳐다봤지? 닫힌 욕실 안에서 구석구석 알몸을 닦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언니는 언제부터 나를 지켜본 걸까. 수북한 털 사이로 보이던 아버지의 시커먼 고추. 꺄악! 이불에 파묻혀 소리를 질렀다.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리자 언니가 우당탕 뛰어나온다. 엄마인가, 늦는가 보다. 아버지가 한참 짜증을 내다가 동네 어르신들과 약주 한잔하겠다고 나가버리셨다. 집에는 나와 언니만 남았다.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 떨어진 지가 한참 지났지만 방 불은 켜지 않았다. 언니가 내 방문을 두드린다. 안 먹는다고 말할까 하다가 약점이 잡힌 기분이 들어 문을 열고 부엌으로 갔다.

언니는 메추리알을 밥 위에 올리고 크게 한술 뜨고 있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개미 더듬이처럼 젓가락이 움직였다. 식사를 먼저 끝낸 언니는 의자를 식탁 밑으로 밀어 넣었다. 남은 반찬을 냉장고에 넣고 그릇이 부딪치지 않게 조용히 설거지를 끝냈다. 거실에서는 수사 극이 한창이었다. 살인자가 형사에게 잡히는 내용이었던가. 좋아하는 프로였지만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아 그냥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너 그거 봤지?”

낯선 목소리였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언니는 멍한 표정으로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집에는 언니와 둘 뿐이었다. 싸늘한 전율이 등을 쳤다. 혹시 해파리의 목소리일까?

그때 언니가 고개를 돌리며 차가운 얼굴로 한마디 했다.

“꼬추 봤지 너?”

“어?... 뭐가? 왜?”

“그게 그렇게 신기하냐?”

“………어?”

“아빠 꼬추는 너무 늙었어.”
“뭐?”

“븅신. 크크”

언니는 나를 바보로 여겼다.

"남자 몸 처음 봐요?"

“그 새끼랑 있는 거 또 한 번 내 눈에 띄면 죽여버린다.”

“애기야, 여기 뭐 있는지 아니? 궁금하지 않아?”

"미쳤냐, 내가 너 같은 년이랑”

"남자 고추가 여기에 들어가는 거 알아?”

"엄마 잠옷 찢은 게 누구야?"

"저질이네, 너."

"오늘 가지 마요. 시오 선배. 나랑 같이 있자"
바깥엔 올챙이만 한 차가운 빗방울이 벌써 한 시간째다. 움푹 팬 거리의 상처가 작은 연못이 되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올챙이가 물을 찾듯 꼬리를 끌고 상처 속으로 곧 합류한다. 축축한 비 냄새가 사람들의 젖은 발길에 자꾸 치였다.

일식집 시계가 11시를 넘기자 7명의 팀원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위하여!' 간판이 흔들리게 소리친다. 움직이지 않는 접시 위의 도미 머리, 분홍 사시미를 와사비 장에 듬뿍 찍었는지 몽롱하던 코가 찡하다. 송별회 주인공인 내 앞, 사케 잔은 쉬지 않고 넘친다. 꼬부라진 혀가 또 한 잔에 젖는다. 사람들 머리가 당구공처럼 빙글거린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택시를 타겠다고 먼저 일어나자, 술기운에 동태눈이 된 팀원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태하가 송별회 내내 걸렸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헐레벌떡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걸었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칼이 젖어 뺨 위에 달라붙자 그제야 검은색 우산을 폈다. 웅덩이에 다리를 몇 번 헛디뎠다. 취기에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멈춰 선 단란주점에서 남화용의 노래가 나온다.

'다시 돌아온단 말없이 차마 떠나가리라… 사랑도 이별도…'

음정이 불안한 남자가 끝내 노래를 끝맺지 못하자 간주도 잠시 뒤 멈췄다. 모르는 이의 우산에서 물방울이 튀자 정신이 번쩍 든다. 우산이 거리를 한가득 채워 앞이 보이지 않는다. 길가엔 택시를 잡는 사람들과 클랙슨 소리, 양껏 취한 취객들의 스텝이 엉킨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태하의 어깨에 정신을 잃고 기대어 있었다. 태하의 얼굴이 보였다. 검은색 재킷과 H라인 브라운 가죽 치마가 무례한 빗방울에 반쯤 젖었고 검정 에나멜 구두 속 스타킹은 퉁퉁 부은 발가락에 붙어 미끄덩거린다. 가죽 치마의 물기를 기운 없는 손으로 천천히 털어냈다. 돌아보니 내 머리칼에서 떨어진 빗물이 태하의 곤색 재킷 한쪽을 완전히 적셔놓았다. 미안하다는 생각에 머리가 더 아파졌다. 택시를 타려던 곳에서 얼마나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태하의 어깨가 아니라도 기대고 싶었던 것 같다. 왁자지껄한 술손님들의 목소리가 비트 빠른 유행가에 뒤섞인다. 머리가 빙빙 돈다. 두리번거리며 다른 직원이 있나 찾아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 따라왔어? ...혼자 나온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회사 그만두고 그렇게 달아나면 내가 혼자 가게 둘 것 같았어요?”

“...다른 사람들은?”

태하는 내 몸을 자신의 어깨로 가져갔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태하의 책상으로 커피를 가지고 가거나 귀여운 표정으로 졸졸 쫓아다니며 밥을 먹던 여자 후배들의 얼굴이 뒤섞여 그려진다. 둘의 얼굴이 점점 하나로 찌그러진다.

“오늘 가지 마요. 시오 선배, 같이 있어요.”

태하가 기댄 내게 이야기한다. 젖은 손을 잡고 다시 말을 한다.

“나 아직 할 말이 너무 많아요.”

태하를 피해 겨우 회식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엉망이 되어버렸다. 머릿속이 노랗다. 음악 소리에 귀가 터질 것 같다.

‘꼬마야 이리 와봐. 아저씨가 호랑이 보여줄게.’

그 말이 떠올랐다. 들짐승에 가깝다고 느꼈던 세 남자들의 눈빛도.

“너도 호랑이로 변하니?”

“무슨 소리예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키득 거렸다. 태하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 멋쩍게 따라 웃었다.

‘태하는 다정하게 호랑이를 보여준다고 속삭일 것 같네. 결국에는 이빨을 드러내고 무참히 목덜미를 물어뜯는 호랑이.’
그 와중에도 태하의 애무는 어떨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술김에 이성이 느슨해졌나. 태하는 그냥 귀엽다. 심장이 뛰진 않는다.

섹스를 하기 전에 속삭이는 많은 언어와 유희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뱉는 온갖 달콤한 말들. 그리움이 증폭될 때에는 스킨십이 없어도 안기고 싶었다. 지금껏 태하와 나의 시간은 서로의 어느 부위를 자극하고 있을까.

"...이런 것들 때문에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생각을 하느라 앞의 말을 듣지 못 했다.

“응? 뭐라고 했어? 다시 한 번 말해줄래?"

“이제껏 얘기했잖아요.”

“삐쳤어?”

배시시 웃으면서 태하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태하가 이내 다시 웃는다. 탁자에 팔을 괴고 이야기했다.

“좋은 사이는 어떤 사이야? 같이 자는 사이?”

“귀엽네요. 그렇게 말하니까.”

“많이 자봤어?”

“궁금해요?”

“아니. 하나도 안 궁금해.”

태하의 얼굴이 찌그러진다. 그런 말이 오가는 것이 싫지 않았지만, 울렁거리는 속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불편했다. 들러붙는 젖은 옷을 빨리 벗고 싶었다.

“태하야, 집에 갈 시간 됐어. 나 먼저 일어날게.”

“잠깐만 기다려요. 계산하고 올게요.”

“먼저 일어…”

내가 말을 끝맺기 전에 자리에 다시 앉히고 카운터로 간다. 계산을 끝마치고 와서는 어깨를 일으켰다. 조금 비틀거렸다. '정신은 멀쩡해.' 속으로 생각했다. 멎을 것 같지 않던 비가 그쳤다. 주점 앞으로 나와 싸늘한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다. 갑자기 한기가 밀려왔다. 태하는 부들부들 떠는 내 어깨를 두 팔로 감쌌다. 올려다 본 하늘은 역겨운 속처럼 꾸욱 비를 참는 듯 답답하게 느껴졌다.

“많이 취했죠? 걸을 수 있겠어요?”

“이 정도는 괜찮아.”

“선배. 술 좀 깨고 가.”

호랑이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나. 그래서 뭘 어쩔 건데. 날 어떻게 할 건데. 태하는 흔들리는 줄 위에 간신히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딛는 바닥이 아련하게 멀다.

“나랑 뭘 하고 싶은데?”

“나 그런 놈 아니에요. 나는 선배랑 좀 더 이야기를...”

또 뭔가를 열심히 말했다. 뒤의 말은 전혀 듣지 않았다. 어차피 궁금하지도 않았다. 정신이 돌아왔다가 또 이내 발을 헛디딘다. 조금 걸으니 더는 상점이 보이지 않는다. 길 외각에 도착하자 모텔이라는 환한 간판이 보였다. 그때 태하가 두르고 있는 팔을 어깨에서 기분 나쁘게 걷어냈다.

“나 이제 택시 타고 갈게.”

“선배 진짜 이럴 거예요? 사람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 거야?”

“뭐가.”

“그럼 지금까지 왜 있었어요?”

“네가 따라왔잖아요. 신태하 씨.”

“그래, 그러니까 조금만 더 있어 주면 안 되겠어요?”

“뭐를? 이제 회사도 그만뒀는데 왜 같이 있어 줘. 취한 사람 데리고 장난하는 거 좋니?”

어깨를 잡더니 잠시 후 와락 끌어안았다. 태하의 목덜미에서 무스크 향이 강하게 밀려왔다. 콧속이 자극받자 구토가 나오려는 걸 참느라 눈을 질끈 감았다.

“잠깐 반말해도 돼요? 할래 반말. 너한테 느껴지는 그늘 같은 게 좋아. 조금 위험해 보이는 걸음걸이도 좋고.”

태하가 다급해진 모양인지 이것저것 지껄인다. 그래도... 따뜻하다. 다리는 버틸 기운이 없고 종이 인형이 된 느낌이 들었다. 덜 마른 석고같이 그의 품에 안겨있다. 시간이 다 되기 전에 껍데기를 벗겨버리면 나는 흐물흐물해지고 못쓰게 돼. 태하야. 이건 젖은 석고 같은 감정이야. 굳기 전에 자꾸 만지면 나는 절대로 마르지 않아.

젖은 발가락을 오므린 채 제멋대로 속삭이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시오야.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어."

태하가 면접을 보던 날, 나는 예비 신입사원들을 관리해야 했다. 9시 정각에 시작되는 면접에 나는 30분이나 지각했다. 멕시코로 발령이 난 친구와 밤새 5차까지 달렸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헐레벌떡 정류장으로 달렸지만 그날따라 환승 운이 따르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대기실로 쏜살같이 들어갔다. 그때 문 앞에서 숨을 몰아쉬는 나를 이미 도착한 예비 사원들이 일제히 바라보았다. 유독 초롱초롱하던 태하의 눈빛이 기억난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태하가 내밀었다. 그랬던 태하가 지금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하고 있다. 안된다고 하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포기하는 나에 비해 태하는 자기 것을 언제나 잘 움켜쥐었다.

"가지마. 같이 있자."

귓속에 가련한 듯 속삭인다. 듣고 싶지 않다. 어린 시절 내가 부모님을 붙들고 이야기하는 듯한 모습이 중첩된다. 태하에게는 애원하는 게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거칠게 밀어낼 자신이 없다.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생각나는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나 뭐 하지 이제? 오늘부터 백수네. 나.”

“뭐야 선배, 겨우 분위기 잡고 있는데...”

“근데 선배가 왜 이렇게 귀엽지?”

“나도 회사 그만둘까? 우리 같이 회사 차릴래?”

그 말을 하고 태하는 나를 한참 꼭 끌어안았다. 귀여운 태하. 나쁘지 않았다. 이런 감정으로 잠자리로 간 남자들도 많았지. 받는 마음이 항상 과분했다. 그때 태하가 고개를 돌려 젤리처럼 부드러운 입술을 포갰다. 밀어내지 않았다.

부드러웠다. 혀가 입술을 감미롭게 자극한다. 태하가 내쉬는 숨에서 뽀얀 술 냄새가 풍겼다. 키스를 하는 동안 목덜미와 등을 부드럽게 만지자 살짝 몸에서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자 태하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장난기 서린 웃음을 보이다가 이내 불쌍한 강아지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가 팔로 세게 허리를 꼭 끌어안는다. 꽉 안은 그의 중심이 딱딱해진 것이 느껴졌다. 팔에 힘을 주고 뼈가 으스러질 듯 끌어안는다. 또 현기증이 밀려왔다. 더 이상 진행되면 안 될 것 같았다. 주황색 빈차 등을 켠 택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택시!”

“갈게. 다음에 봐! 태하야!”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택시에 올랐다. 마음이 진정되니 라디오 디제이의 차분한 음성이 들린다. 손이 허전하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또 우산을 두고 왔다. 딱딱한 두 가지를 놓고 왔구나. 우산처럼 딱딱한 태하의 남성이 선명하다. 태하도 남자가 맞네. 후배 중 태하와 잔 여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하는 몇 명하고 잤을까. 질투일지도 모르는 감정이 머릿속에 거미줄을 쳤다. 쓸데없는 생각을 걷어내도 이내 차올랐다.

만일 오늘 태하와 밤을 보냈다면 어땠을까. 한 번도 남자와 관계를 하며 오르가슴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잠자리를 하다 보면 다른 게임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결승점이 있는 백 미터 계주, 나는 요가나 체조를 하는 느낌. 스킨십도 별 의미가 없을 테니. 오늘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

핸드백이 흔들린다. 태하일까 하고 전화기를 꺼냈다.

발신자는 언니.

그 쌍년.


작가 소개  
조금 어린 나이의 결혼 그리고 빠른 나이의 이혼, 통신회사, 콜센터, 어학원 운영 중 경영악화로 빈털터리가 됨. 2년간 낙오자라는 패배감으로 자폐적인 시간을 보내던 중 무작정 세계 여행을 시작. 1년 정도 해외 여행 중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 성을 사회적, 문화적으로 조망하는 시와 수필을 SNS에 연재 중이다.

<아스팔트에 핀 꽃> 동인 시집 발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