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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 디렉케이터, 암 환우 뷰티관리사…취직 대신 새 직업 만드는 청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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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숙명여대 하미연(독일언어문화학과, 14학번)씨는 청각장애를 가진 박민영(법학부, 15학번)씨의 스페인어 수업 대필 도우미를 했다. 자연스럽게 박씨가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다. 영어가 문제였다. 해외여행을 할 때마다 박씨는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청각장애우도 같은 어려움을 안고 산다. 이들을 돕기 위해 박씨와 동기인 조은희, 이희재씨가 뭉쳤다. 청각장애우의 영어 발음을 돕는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엘라움’이란 팀을 꾸렸다. Language의 ‘L’과 방을 뜻하는 독일어(Raum)를 합한 명칭이다.

문화·예술·콘텐트 분야서 새 도전
창직어워드 4년간 50개 직업 탄생
“창업보다 일자리 다양성 더 기여”

1년 동안 온갖 시도를 했다. 그리고 지난해 ‘시피킹(SEEpeaking)’이란 앱을 내놨다. 방식은 간단하다. 앱을 구동하면 화면에 영어단어가 뜨고, 단어를 발음할 때 입모양이 동영상으로 제공된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동시에 뜨는 자신의 입모양과 비교하며 발음을 교정할 수 있다. ‘엘라움’은 이 앱을 만들어 친구에게 도움만 준 게 아니다. 그들은 ‘발음 디렉케이터(Director+Communicator)’라는 신직업의 창조자가 됐다. 우정이 직업을 만든 셈이다. 이들은 지난해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주최한 ‘창직 어워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엘라움처럼 새로운 직업을 만드는 걸 창직이라 한다. 문화, 예술, 콘텐트 분야에서 기존의 직무를 재설계하고, 통합하면서 신직업을 창출하는 작업이다. 하고 싶은 일이지만 세상에는 없는 직업을 나만의 직업으로 만드는 청년들의 패기와 도전정신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래서인지 창직한 청년의 활동도 활발하다. 2014년 출범한 동국대의 ‘농부릿지’는 40여 명에 달하는 디자이너와 20여 곳의 영농조합법인과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의 직업은 ‘농업마케팅 플래너’. 이들은 농업분야에 청년만의 톡톡 튀는 디자인과 마케팅 기법을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해 판로를 개척한다. 지난해까지 오프라인에서만 활동하다 올해는 온라인 서비스망도 개설할 예정이다. 이들은 농업의 혁신이라 일컫는 6차 산업 강의나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며 그들만의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6일 서울 KDB생명타워에서 열린 ‘2016 창직어워드 연말경진대회’에도 15개 팀이 스스로 만든 새 직업을 소개했다. 이들이 내놓은 직업은 기발하다. 꽃과 직물을 융합한 ‘원예치료 및 인테리어’, 로봇으로 즐기는 스포츠인 ‘스포츠 로봇 마스터’ 등. 언뜻 보기엔 돈이 될까 싶지만 전문가로부터 시장성을 인정받은 직업이다. 2013년부터 시작된 청년 창직어워드를 통해 새로 탄생한 직업만 50여 개에 달한다.

올해 대상을 받은 직업은 ‘암 환우 뷰티관리사’다. 투병에 지친 암 환자라고 예뻐지고 싶은 욕망이 없을까. 남이 보기에 아름답다면 병마를 이기는데도 심리적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서 동주대 인디뷰티팀이 만들었다.

산업인력공단 이연복 직업능력국장은 “창업보다 높은 개념의 창직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직업 생태계를 새로 꾸리고, 일자리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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