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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무력부장傳(3)] 청와대 습격 ‘1·21사태’ 배후 김창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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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민족보위상(인민무력부장)은 김창봉(1919~·)이다. 김창봉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1968년 청와대 습격 사건이다. 국가원수를 시해하려던 사건이라 한국이 발칵 뒤집혔다. 북한의 무모한 도발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사건은 북한 군부들이 196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군 20주년 기념에 때 맞춰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시도였다. 김일성에 대한 과잉충성의 산물로 알려져 있으며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을 해방하고 김일성의 환갑을 서울에서 지낸다는 계획이었다.

김신조(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는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 실패 후 유일하게 생포된 공작원이다.[사진 중앙포토]

김신조(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는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 실패 후 유일하게 생포된 공작원이다.[사진 중앙포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이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해 “내부 좌익 맹동 분자들이 저지른 일이지 결코 내 의사나 당의 의사가 아니었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2002년 한국미래연합 대표 자격으로 방북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그 때 그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응분의 벌을 받았다”고 유감을 표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그 일에 관여한 지 여부는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려 진실이 가리기는 현재로서는 어렵다. 다만 김일성과 김정일이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고 ‘내부 좌익 맹동 분자’, ‘그 일을 저지른 사람’으로 지적한 사람은 김창봉이다.

김일성이 지적한 ‘내부 좌익 맹동 분자’인 김창봉은 1919년 함경북도 경원군에 태어나 1938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5사에 소속돼 안길(1907~1947)의 지휘 아래 항일빨치산 활동을 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1950년 12월 제12사단장, 1951년 4월 제8군단장을 역임했다. 1953년 7월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7군단장을 맡았다. 1959년 7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에 임명됐고 1962년 10월부터 1968년 12월 숙청당할 때까지 민족보위상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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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보위상에 오른 김창봉은 과욕을 부렸다. 당시 군부는 김일성의 핵심 집단이었고 빨치산 출신들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지금과 달리 군대 내의 당의 유일사상체계가 정착되지 못했고, 당의 군에 대한 지도도 허술했다. 기고만장했다.

때 마침 조선인민군 창군 20주년 기념이 다가오자 ‘대형사고’를 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무장게릴라 31명이 청와대 대통령 관저로부터 500m 거리까지 잠입했다가 교전 끝에 27명이 현장에서 살해됐고 3명을 탈출했으며, 1명은 생포된 것으로 끝났다.

뿐만 아니라 하루 뒤 22일에는 북한 원산 앞 공해상에 있던 미국 국가안전국(NSA) 소속 정보함 푸에블로호(USS Pueblo)를 나포했다. 생존한 승조원 82명과 유해 1구는 평양으로 압송된 후 사건 발생 약 11달이 지난 그해 12월 23일 판문점으로 귀환했다. 미국은 항공모함과 구축함을 급파해 북한을 압박했지만 결국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북한과 승무원 송환해 합의했다.

김창봉은 1월 21일에 있었던 청와대 습격을 주도했고 하루 뒤 22일에는 강원도 원산 앞 공해상에서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나포를 지시했다. [사진 중앙포토]

김창봉은 1월 21일에 있었던 청와대 습격을 주도했고 하루 뒤 22일에는 강원도 원산 앞 공해상에서 미국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나포를 지시했다. [사진 중앙포토]

김창봉은 이 사건의 실패로 문책을 받지 않았다. 당시 김창봉은 김일성의 막대한 신임을 얻고 있었고 군사 업무에 관한 한 당의 간섭을 별로 받지 않았던 터라 그냥 넘어갔다. 문제는 김창봉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김영주(김일성 동생) 당 조직지도부장이 김일성에게 이들의 전모를 보고하면서 터져 나왔다.

김영주는 김창봉이 호화별장을 지어놓고 방탕한 생활을 한 행위, 특수훈련을 이유로 군(郡) 인민위원회 등의 사무소를 습격한 행위, 심지어 인민위원장을 납치한 행위, 당의 지시와 명령에 불복한 반당 행위 등을 김일성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은 김창봉 숙청에 앞장섰는데 그는 김일성의 동생이기도 했다. [사진 노동신문]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은 김창봉 숙청에 앞장섰는데 그는 김일성의 동생이기도 했다. [사진 노동신문]

김창봉은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오는 것을 예감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더 무모한 행위를 저질렀다. 그것이 ‘이승복 사건’이란 이름이 붙여진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이다. 하지만 이것마저 김창봉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김창봉은 1969년 1월 조선인민군 제4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숙청됐다. 김일성은 이 회의에서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보다 김창봉의 죄가 더 크다. 8월 종파사건은 주동자들이 뒤에서 쑥덕거리며 당의 유일사상을 헐뜯었지만 당의 군사노선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창봉은 당의 군사노선을 전부 엎어놓았다”고 비판했다.

김창봉 숙청 이후 군대에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정치위원제가 실시됐고 중대 단위에는 정치지도원이 파견됐다. 군대 내 모든 명령서에는 군사 간부 혼자서 서명하지 못하고 정치위원도 서명을 해야 효력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당 조직지도부는 군대에 대한 당 사업을 완전히 장악했고 조직지도부에서 군대 내 정치일꾼들을 담당하는 부부장과 담당과를 신설했다.

북한 당국은 김창봉을 숙청했던 것과 달리 원산항에 있던 푸에블로호를 1995년 초 현재 위치한 대동강변으로 가져와 계급교양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사진 우리민족끼리]

북한 당국은 김창봉을 숙청했던 것과 달리 원산항에 있던 푸에블로호를 1995년 초 현재 위치한 대동강변으로 가져와 계급교양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사진 우리민족끼리]

김창봉 숙청은 1967년 박금철· 이효순 등 갑산파 제거에 이어 두 번째 항일빨치산에 대한 숙청이며 1970년에 있는 세 번째 항일빨치산 숙청의 징검다리가 됐다. 세 번째 항일빨치산의 숙청때 2대 민족보위상인 김광협이 포함됐다. 이로써 항일빨치산 가운데 김일성 직계인 제1로군 출신 항일빨치산들만이 북한 정치의 남게 됐다. 최현 민족보위상, 오진우 총참모장, 한익수 총정치국장 등이 그들이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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