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박 대통령, 다 내려놓고 현실을 직시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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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사람의 값어치는 나아갈 때보다 물러날 때 잘 드러나는 법이다. 잘못을 부인하고 거짓말로 꾸미며 잔명(殘命)에 연연하는 건 추하다. 검찰 공소장을 받아든 박근혜 대통령의 행태는 일국의 대통령답지 않다. 지난 4년간 그를 대한민국의 국정운영 책임자로 여겨온 상당수 국민은 허탈감에 빠져 있다. 박 대통령은 무엇보다 대한민국 공권력의 중추인 검찰권을 총체적으로 부정했다. 그는 변호인을 통해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를 보면서 도저히 객관성과 공정성을 믿기 어렵다는 판단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군과 함께 대통령 통치권의 양대 기둥인 검찰의 존재와 역량을 이렇게 정면으로 부정했으니 자기 모순과 국기(國基) 부정이 도를 넘었다. 현직 검찰총장을 임명한 대통령이 총장이 지휘한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하다니 이 자체가 또 하나의 국기문란 사건이라 할 것이다.

공권력의 중추를 대통령이 부정
검찰·특검·국회총리 다 거부하나
사람 값어치는 물러날 때 드러난다

 한때 원칙과 신뢰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박 대통령이 이런 원칙 없고,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돌변한 건 안타까운 일이다. 국가의 운명이나 국민의 안녕이야 어떻든 자신의 임기만 끝까지 채워 신상의 안위를 챙기겠다는 것 아닌가. 이런 문제적 인격은 세상과 공감을 거부하는 성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이틀간 변호인의 공소장 반박문과 청와대 대변인의 발언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박 대통령은 검찰, 특검, 탄핵, 국회 추천 총리의 4대 국정수습 경로를 모두 부정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박 대통령은 변호인을 통해 검찰 조사에 불응 방침을 밝힌 데 이어 “중립적인 특검에 대비하겠다”고 했다. 특검이면 특검이지 구태여 ‘중립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국회가 통과시킨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암시한 것이다. 특검법은 특검 2명을 모두 야당이 추천하기로 돼 있는데 박 대통령은 그게 ‘중립적이지 않다’는 인식을 시위한 셈이다. 탄핵과 관련해선 “공소장에 기재된 대통령의 관여 여부나 ‘공모’ 기재는 사법기관의 최종 판단 없이는 법률상 무의미한 것”이라고 반격했다. 국회가 탄핵 추진의 근거로 삼고 있는 공소장의 효력이 무의미하다고 혼자 외친 것인데 대통령이 스스로의 세계에 갇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박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해 국회의장에게 새 총리를 추천해 달라고 한 게 지난 8일이다. 청와대 대변인은 13일 만인 어제 “상황이 좀 달라졌으니 좀 지켜보자”고 한발을 뺐다. 상황이 달라졌다면 13일 전 대통령의 제안을 반대했던 야당이 지금은 입장을 바꿨다는 점이다. 막상 국회 추천 총리가 나오려 하니까 갑자기 대통령의 생각이 바뀐 것인가.

 박 대통령은 다 내려놓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검찰 수사에 협조하고, 특검을 군말 없이 수용하고, 탄핵에 시비 걸지 말고, 국회가 추천할 새 총리를 선뜻 받아들여야 한다. 그 뒤의 운명은 사법부와 국회, 국민의 흐름에 맡겨라. 18대 대통령으로서 깨끗하게 뒤처리를 함으로써 국민의 수치심이 더 깊어지지 않게 해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