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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촛불 다음의 법적·정치적 해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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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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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 촛불집회 이후 청와대가 많이 바뀐 모양이다. 최순실과 문고리 3인방이 제거되면서 비서실장·수석 등 공식 참모들의 건의가 바로바로 먹혀 든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외부 인사들과도 부쩍 자주 만난다는 소문이다. 종교 지도자와 공개된 모임뿐 아니라 사회 각계의 다양한 인사들을 청와대나 안가로 모셔 의견을 듣는다는 것이다. 늘 혼자 식사하고 해만 지면 관저에 웅크려 있던 예전과 딴판이다. 박 대통령이 뒤늦게 제정신을 찾은 모양이다.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최근 외교부·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인사에 야당은 핏대를 세우고 있다. “외치를 계속 맡겠다는 것이냐” “부역자에 대한 보은 인사”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조태열 외교 2차관은 오래전에 유엔대사로 내정돼 아그레망 승인이 나올 때까지 엠바고(보도유예)를 요청한 사안이었다. 문체부의 유동훈 2차관 내정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그는 문화·체육과 거리가 먼 이른바 ‘공보처’ 출신이다. 김종·차은택의 횡포에 부역한 체육이나 문화 관료들보다 훨씬 낫다. 김종처럼 엉뚱한 외부 인사를 앉힐 때도 아니다. 오히려 외교부·문체부 쪽은 “1급 등 후속 인사에도 청와대의 ‘비밀 지시’가 사라져 비정상 인사가 정상화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미 ‘피의자’가 됐다. 이제는 ‘질서 있는 퇴진’을 고민해야 한다. 문제는 정치 계파들끼리 서로 다른 셈법이다. 친박들은 퇴진에 결사 반대다. 대통령이 물러나는 순간 자신들도 줄줄이 단두대에 서야 할 신세다. 마땅한 대선후보도 없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귀국 때까지 뻔뻔하게 버틸 수밖에 없다. 문재인 측은 ‘무조건 퇴진’을 고집한다. 여론조사에서 앞서 있고 대규모 대선 캠프까지 준비해 놓은 만큼 하루라도 빨리 보궐선거를 해야 당선에 유리하다. 안철수 쪽도 ‘즉각 하야’가 최선의 시나리오다. 새누리당이 분열되고 문재인과 일대일 구도를 만들어야 중도 보수표 흡수에 유리하다는 계산이다.

 문제는 박 대통령의 선택이다. 김종필 전 총리는 “5000만 명이 달려들어도 끄떡 않을 것”이라 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10·26 이후 끔찍한 배신 트라우마를 경험했다.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거나 퇴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현실적 카드는 ①여야가 새 총리를 합의하고 ②국회가 탄핵해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으며 ③헌법재판소의 탄핵 결과를 지켜보는 수순이다. 물론 정치적 해법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 참고할 만한 사례가 미국의 ‘닉슨 모델’이다. 닉슨은 1974년 7월 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되자 거취를 고민했다. 상원의 탄핵 승인마저 분명해지자 정치적 협상을 통해 사면을 조건으로 8월 8일 스스로 사임했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포드는 딱 한 달 만에 그를 사면했다.

 촛불집회의 분노는 정당하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독재자가 종신 집권하는 나라가 아니다. 5년마다 직접 투표로 정권을 바꿀 수 있다. ‘촛불 100만 개 이상, 지지율 5%면 대통령 무조건 퇴진’은 헌법정신에 맞지 않다. 정치권이라도 냉정하게 현실적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 야당이 중요하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계엄령을 내릴지 모른다”고 했지만 야 3당이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를 결의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만큼 야당은 힘이 세다. 촛불에 편승해 반사이익만 챙겨선 안 된다. 우선 합의총리부터 뽑아놓고, 대통령 없이도 국가가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최순실 사태의 여론조사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따로 있다. 차기 대선주자인 반기문·문재인·안철수의 지지율이 박스권에 갇혀 있고, 보수층의 실망으로 무당층만 21.9%로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언제 누구든 한 방에 훅 갈 수 있는 살얼음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분노와 함께 박 대통령의 질서 있는 후퇴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필요하면 닉슨처럼 사면 등 퇴로를 열어주는 방법도 고민해야 할 듯싶다. 차기 대선주자들도 어떻게 대통령 권력을 감시하고 제한할지를 최우선 공약으로 삼았으면 한다. 어쩌면 그것이 청와대로 가는 지름길일지 모른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