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69)|청주 정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청주 정씨는 춘곡 정탁 (세종·우의정), 백곡 정곤수 (선조·좌의정), 약포 정탁 (선조·좌의정), 한강 정구 (광해·대사헌·학자) 등 당대의 석학과 명신을 낳았다. 이들은 청주 정씨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대표적 인물들이다.
정탁은 조선 개국 공신. 고려 우왕때 문과에 급제했고 이성계의 쿠데타를 도와 개국 공신 일등에 올랐다. 태조 2년 제1차 「왕자의 난」때는 방원을 도와 정사 공신 이등에 올랐다. 세종 때의 관직은 우의정. 사후 태종 묘정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다. 고려말 정당 문학을 지냈던 그의 형 정총도 조선 개국 일등 공신.

<광해군 폭정에 판기>
정곤수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원군을 끌어들이는데 큰공을 세운 대명 외교의 제1인자. 당시 우승지였던 그는 선조를 의주로 피신시킨 뒤 명나라로 건너가 명의 원군을 끌어들이는데 탁월한 외교 솜씨를 발휘했다. 좌찬성·예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조선 중기에 예학자로, 문장가로 명성을 떨쳤던 정구는 정곤수의 아우요, 김굉필의 외증손이 된다. 일찌기 조남명·이퇴계 등에게서 성리학을 배운 그는 광해군 1년 대사헌에 임명 됐다. 대사헌은 감찰 업무를 맡는 권력의 핵심. 그러나 그는 벼슬에 집착하지 않고 광해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었다.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고 상소한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동)으로 돌아갔다. 광해가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시켰을 때도 그는 영창대군을 구하기 위해 상소의 붓을 들었다.
정구는 낙향후 신정동에 백매원을 세우고 매화 향기 속에 묻혀 살며 후학 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그는 경학·산수·의약·풍수 등 모든 학문에 정통했으며 특히 예학에 밝았다. 당대의 명문장으로 글씨도 으뜸이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명신이었던 정탁은 곽재우·이순신·김덕령 등 명장을 발탁했으며 모함을 받고 죽음 직전에 있었던 이순신을 구출한 장본인으로 유명하다.
『순신은 참으로 장수의 재질을 가졌사옵고 육전과 해전의 재질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물은 쉽게 얻지 못할 뿐더러 백성들이 의지하는 바가 크옵니다. 만일 공과 허물을 비교하지도 않고, 앞으로 더 큰공을 세울만한 능력이 있고 없음도 생각하지 않고, 또 그간의 사정을 천천히 살펴 볼 여유도 없이 끝내 큰 벌을 내리신다면 공 있는 자와 능력 있는 자들은 앞으로 스스로 국가를 위해 더 애쓰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글은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이 국문을 받아야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자 정탁이 왕에게 올린 저 유명한 상소 「논구 이순신」의 일부다. 정탁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 얼마나 인재를 아꼈는가를 느끼게 하는 명문이다.
정탁은 퇴계의 문인으로 명종 13년 문과에 급제, 대사헌·좌찬성 등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박학다식한 명신. 경서·천문·지리·병법에까지 통달했다. 예천의 도정서원에 재향 되었다.
청주 정씨의 시조는 고려 때 중랑장이었던 정극경이다.
정호 (3세·대장군)는 청주정문을 고려사에 드러낸 명장. 고종 4년 서경 (평양)의 최광수의 난을 진압, 큰공을 세웠다. 고종 20년에는 필현보가 난을 일으키자 선유사의 명을 받고 적진으로 갔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적의 위협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복을 요구하다 순직했다.

<시조는 정극경>
정계 (충렬사·찬성사), 정책 (충숙조·대제학) 등도 고려의 인물.
설헌공 정오 (공민왕의 사부)와 설곡공 정포 (충숙조·좌사간) 형제도 빼어났다. 오늘날 청주 정씨는 설헌공파와 설곡공파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조선 개국 당시 이 형제의 후손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설헌공의 후손 정침 (공민왕·소부정윤)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안동으로 은거했다. 반면에 설곡공의 후손 정총과 정탁 형제는 이성계를 도와 개국 공신에 오르고 가문의 세를 크게 일으켰다.
설공파는 안동·예천·문경·봉화·영양 등지에, 설곡공파는 경기·황해·성주·경산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조선조 문과 급제자는 총 19명. 정사성 (선조·학자) 정윤해 (선조·학자) 정전 (인조·학자) 정사신 (광해·정언) 정윤목 (광해·학자·명필) 정옥 (영조·관찰사) 정곽 (영조·군수)정범낙 (인조·돈령부사) 정개 (인조·학자) 정필규 (영조·학자) 등이 가문을 빛냈다.

<정래붕은 항일 순국>
일제하에 중국으로 망명, 김좌진 등과 대한 군정서를 창립하고 청산리 전투에서 군수 참모로 활약하다 순국한 정래붕, 1917년 봄 파리 평화 회의에 보내는 독립 청원서에 서명하고 일제에 항거하다 일경에 피살된 정재기, 을사보호조약 (1905)이 체결되자 관직 (궁내부주사)을 버리고 황해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장연·송화 등지에서 혈전을 벌이다 포로가 되어 처형당한 정회규 등은 조국 독립의 제단에 피를 뿌렸다.
정문흠 (전 국회의원) 정재원 (전 국회의원) 등은 해방후의 얼굴들.

<지명 인사><종친회 제공·무순>
▲정종흠 (전 포항시 의원) ▲정덕용 (문공부 감사관) ▲정세호 (전 경찰서장) ▲정경화 (전 경찰서장) ▲정상원 (농림수산부 통계 담당관) ▲정시호 (경북대 교수) ▲정철 (문박·경북대 교수) ▲정조섭 (경제박·중앙대 교수) ▲정인재 (공박·서울 과학원 교수) ▲정진덕 (이박·육사 교수) ▲정원용 (난강 학원 이사장) ▲정진우 (공박·재미 교수) ▲정승화 (이박·연세대 교수) ▲정영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정태용 (부산외국어대 교수) ▲정안식 (한국 교육대 교수) ▲정재길 (한국 교육대 교수) ▲정명호 (원광대 교수) ▲정진환 (고등학교장) ▲정서호 (국민학교장) ▲정재수 (국민학교장) ▲정채용 (국민학교장) ▲정택 (국민학교장) ▲정귀호 (서울 고법 부장 판사) ▲정태웅 (서울지법 부장 판사) ▲정재훈 (대구지법 판사) ▲정성진 (서울 북부지청 차장 검사) ▲정재헌 (변호사·전 고법 부장 판사) ▲정영 (변호사) ▲정영학 (전 육군 대령) ▲정계열 (육군 대령) ▲정병호 (공군 대령) ▲정해상 (출판 문화협 회장) ▲정균용 (의박·정산부인과 원장) ▲정재훈 (의박·부산 복음 병원장) ▲정용국 (의박·부산 고려 병원장) ▲정철용 (의박·영천 종합 병원 과장) ▲정원용 (포항 정원용 치과의원장) ▲정건용 (의박·정건용 치과의원장) ▲정상훈 (대전 성모병원장) ▲정인호 (대동 정형외과 원장) ▲정재호 (영대 병원 과장) ▲정동원 (전 중앙 수협 총무 이사) ▲정덕섭 (전 대한체육회장) ▲정승도 (문경군 정화 위원장) ▲정동수 (평통 자문회의 대구 중구 협의 회장) ▲정창화 (유도회 포천 지부장) ▲정완 (한일은행 지점장) ▲정재창 (국민은행 지점장) ▲정경호 (흥국생명 이사) ▲정재호 (서울 농협지부장) ▲정재호 (전 삼호 방직 사장) ▲정갑진 (부산 동화 공업 대표) ▲정재성 (서만 건설 주식회사 대표 이사) ▲정인조 (주식회사 합신 대표 이사) ▲정조일 (서원 전자 공업 사장) ▲정덕용 (주식회사 삼건사 대표이사) ▲정완섭 (동방 카페트 사장) ▲정담 (삼성물산 전무이사) ▲정사승 (청주 정씨 대종 회장) ▲정재열 (전 안기부 관리관) ▲정사준 (의박·경희대 교수) ▲정승화 (의박·현대의원장) ▲정가진 (공박·서울대 교수) ▲정재술 (삼우 기술 공단 부사장) ▲정재원 (상주 낙동 국민학교장) ▲정필원 (문경 산양 국민학교장) ▲정화진 (정진 농장 대표) ▲정재탁 (대우 조선 기획 실장) ▲정찬원 (대한 석공 이사) ▲정운용 (삼광 유리 공업 회사 부사장) ▲정각호 (현대 가구 대표) ▲정승황 (변리사) ▲정신행 (대신 기획부사장) ▲정금섭 (신흥 산업 대표) ▲정호진 (주택은행 지점장) ▲정용화 (전 고등학교장) ▲정재준 (세계 불교 연맹 한국 본부 수련 원장) ▲정용석 (KBS 전 동경 특파원)

<집성촌>충북 성주군 수윤면 수성동|회연 서원 문하생 후손 2천여명이 「경모계」 조직
충북 성주군 수윤면 신정동. 조선 중기 예학자로, 문장가로 명성을 떨쳤던 정구가 광해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낙향, 백매원을 짓고 후학 양성에 여생을 바쳤던 고을이다.
백매원 옛터에 지붕을 드리운 「회연 서원」은 충북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정구의 학문과 위엄을 기리기 위해 설립한 서원이다.
서원 뜨락에선 매화나무가 연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정구는 이 매화 향기 속에 묻혀 후학들을 가르쳤다.
『성주·고령·창령·현풍 등 사방 2백리에 거주하는 선비들이 모두 구자 어른의 문하생들이었지요.』 정구의 17대 종손 정염씨 (52)의 자랑.
지난 85년 문하생의 후손들은 정구의 높은 뜻을 계승하기 위한 경모계를 조직했다. 회원은 약 2천명. 회연 서원을 유지·관리하고 매년. 음력 2월 및 8월 중정에 향사를 올린다.
신정동과 이웃한 수성동 (갓말)은 청주 정씨의 유서 깊은 집성촌. 타성바지라곤 처가살이를 하는 강모씨 한사람뿐 30여 가구가 모두 한 할아버지의 후손들이다.
정구는 서울에서 낙향 후 부친 (정사중)이 세상을 뜨자 수성동 창평산 기슭에 모시고 3년간 여막살이를 했다.
글·김창욱 기자
사진·장남원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