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oo으로 배웠네-시즌2] 결혼식으로 끝나는 영화의 지긋지긋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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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현대인이므로, 실체도 모르는 ‘쿨함’에 중독됐다는 건 인정한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2016)’에서 브리짓이 임신을 확인하던 순간 내 머리에는 ‘아빠는! 애 아빠한테 연락해야지!’라는 생각이 떠올랐으나 브리짓이 한동안 그걸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기에 ‘멋지다’라고 탄식해버렸다. 쿨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영화가 계속되는 동안 혹시라도 그 쿨함이 깨질까봐, 역시나 실체도 없는 쿨함을 신줏단지처럼 붙들어 주길 바랐다.

혼자서도 잘 살던 임산부 브리짓

혼자서도 잘 살던 임산부 브리짓

와장창, 신줏단지는 보기좋게 깨졌다. 영화(특히 로맨틱 코미디)가 쿨한가 쿨하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기준 하나를 이 참에 추가해야겠다. 그 기준은 바로 ‘마지막에 결혼 장면이 나오는가 아닌가’다. 왜 이 영화는 결혼식 장면으로 끝났어야 하는가. 브리짓이 한 팔에 아이를 안고 있었다 해도 쿨함이 깨진 건 깨진 거다.

브리짓 머리의 면사포가 바람에 날아가버리는 식의 잔재주로 쿨한 척 해본 것도 안타까웠다.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를 임신했지만 내 삶은 즐겁다’로 시작한 그 극한의 쿨함을 이렇게 손쉽게 망가뜨리다니. 친한 친구의 잘못된 선택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멋진 친구도 있는데

이렇게 멋진 친구도 있는데

이 장면과 이 영화가 왜 이렇게 안타까울까. 대한민국 30대 여성인 내 마음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나는 결혼을 해야만 한다, 언젠가 할 거다. (이 수많은 사람들의 지청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또 이 세상 모든 남자들과 나를 짝으로 연결시켜보려는 수많은 시도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러나 결혼은 나의 모든 것이 아니다. 만일 결혼을 하더라도 결혼 안 해도 괜찮았던 여성으로서 결혼을 할 거다. 그저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결혼을 선택한 사람일 뿐이지 결혼을 위해 헐레벌떡 달려와 철퍼덕 넘어지며 골인한 여인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다.

노코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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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얘기가 돼 버렸지만 여하튼 나에게 결혼은 구시대의 해묵은 관습이면서도 어떤 식으로도 해결해야할 숙제와 같다. 있으면 잡아야할 기회이되 적당히 거리를 취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 한국 땅에서조차 절반의 사람이 ‘결혼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설문에 답하는 그런 시대다(설문이어서 그렇게 답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렇게 복잡하고 이중적이기까지 한 감정을 만든 '결혼'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브리짓은 단순하게 해결해버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브리짓은 '뭐가 복잡해. 그냥 하고 싶은데 못하는 거잖아, 맞지?' 하고 윙크하는 듯 보였다. 정말 우리는 그렇게 단순할까? 아니면 단순한 걸 복잡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걸까? 결혼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은 그저 쿨한 척함으로써 힘을 얻어 살고 있다는 방증에 불과했을까? 이 영화의 나쁜 점은 더 이상 사랑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 결혼이라는 복잡한 소재를 무 자르듯 잘라서 요리해버렸다는 데 있다.

진짜 우리는 꼭 둘이어야 행복할까

진짜 우리는 꼭 둘이어야 행복할까

만일 내가 이 영화를 만든다면 적어도 결혼식 장면은 보이지 않게 처리하고 싶다. 결혼이라는 힌트만 던져주는 장면을 넣으면서 브리짓이 결혼을 했을까 안 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도록 만들고 싶다. 애 아빠가 있는지 없는지 같이 사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사회의 모든 친구들과 함께 아이를 튼튼하게 키워내는 엄마 브리짓을 그려내고 싶다.

처음 만나는 사람조차 “결혼은 했느냐. 왜 안 했느냐” 또는 “애는 왜 안 낳았느냐” 또는 “남편은 뭐하시냐”는 질문을 당연히 던지는, 그러니까 ‘정상적인 가족’을 디폴트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 천지인 동양 한 나라의 여인이 이 영화를 보고 ‘그래! 이런 현실도 곧 나아질 수 있어!’라고 여길만한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혼자라고 꼭 불행할까

혼자라고 꼭 불행할까

그래, 나는 삐쳤다. 이제 브리짓이 어떤 식으로 구슬러도 마음을 안 바꿀 거다. 죽은 줄 알았던 휴 그랜트가 다시 살아나서 결혼 생활을 방해하는 속편이 나온다 해도, 아이를 안고 직장에 출근하는 브리짓의 분투를 극사실적으로 그려낸다 하더라도 말이다. 16년을 성원한 브리짓의 팬 하나가 이렇게 떠나간다. 내년은 더 추울 것 같다.

하하하하하(공허한 웃음) 기자 socooooool@joongang.co.k*r

연애를 OO으로 배웠네’ 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들이 다양한 문화콘텐트에 연애 경험담을 엮어 연재하는 잡글입니다. 잡글이라 함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기자 이름과 e메일 주소는 글 내용에 맞춰 허구로 만든 것이며 익명으로 연재합니다. 연애 좀비가 사랑꾼이 되는 그날까지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합니다. 많은 의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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